김선미(가명·35)씨는 14개월짜리 딸을 둔 대기업 과장이다. 계획 임신은 아니었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미룰 수 있으면 더 미루고 싶었다"고 했다. 낳고 나서 3개월 만에 복직했다. 육아휴직·단축근무·유연근무 제도가 모두 있는 직장이지만, 쓸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집값 대출도 고민됐다. 남편 월급이 400만원인데, 대출 이자가 100만원 나왔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집 근처 국공립 어린이집 2 곳, 사립 1곳에 대기를 걸었지만 돌 지나도록 연락을 못 받았다. 생후 3개월 때부터 딸을 부산 친정집에 맡겼다. 친정아버지가 아이 물건을 차로 실어간 뒤, 빈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매주 아이를 보러 가고 싶지만, 부부가 KTX 타면 왕복 24만원이다. 부모님께 수고비로 150만원씩 드리고 있다. 더 드리고 싶지만, 지금 드리는 액수도 실은 버겁다.

그동안 김씨가 국가에서 받은 지원은 매달 들어오는 양육수당 20만원에 전기료 할인이 전부다. 고맙게 받아 요긴하게 쓰지만, 둘째 낳고 싶어질 만큼 도움 되진 않는다. 결혼 전엔 '애가 둘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 생각을 접었다. "저출산 정책이 2000개쯤 된다"고 하자, 김씨는 "저만 그런 거 모르는 건가요?" 했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 관계자는 "복지의 특성상, 저출산 지원도 저소득층부터 돌아가게 마련"이라며 "중산층은 국가의 도움을 못 받으니 아이 하나 낳으면 삶의 질과 생활수준이 확 떨어진다"고 했다. 중산층 출산율이 다른 계층보다 낮은 이유다. 본지가 여론조사기관 메트릭스와 함께 수도권 30~40대 남녀 1345명을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 네 명 중 세 명(72%)이 "2000개 정책 중 나에겐 해당되는 건 전혀 혹은 별로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은 결국 '둘째 아이 급감'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중산층이 '하나 더 낳았다간, 어렵게 누리는 지금의 안정을 누릴 수 없게 된다'고 집단적으로 둘째 출산을 접어버린 탓이 크다. 2007년에는 그해 신생아 49만명 중 18만명이 둘째인데 2017년에는 36만명 중 13만명만 둘째였다. 둘째 낳는 엄마가 10년간 5만명 줄어든 것이다. 무역회사 다니는 남편과 6세 딸을 키우는 노혜연(가명·34)씨도 고개를 저었다. "남편이 그래요. 지금 우리 빠듯하다고. 애 하나 더 태어나서, 얘한테 들어가는 거 줄이고 싶지 않다고."

이 심리를 압축하는 게 "'라형'은 아무것도 해당 없다"는 중산층 주부들의 자조(自嘲)다. '라형'이란 여성가족부가 운용 중인 '아이 돌봄' 서비스에서 나온 말이다. 아이 있는 집은 다 똑같이 이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3인 가구 기준으로 부부 합산 월 소득이 442만원보다 많으면 라형, 그보다 적거나 '다문화 가정' 같은 별도의 이유가 있으면 가·나·다형으로 나뉜다.

라형으로 분류되는 순간, 국가는 이 가족들에게서 손을 뗀다. 라형 부부가 하루 12시간, 주 5일씩 4주간 아이 돌보미 서비스를 이용하면 자기 돈으로 이용료 187만2000원을 다 내야 한다. 여가부가 "내년부터 월 소득 564만원까지 지원 대상을 늘리겠다"고 발표했지만, 이용료도 함께 올렸기 때문에 정부가 선전한 만큼 국민들 짐이 가벼워지진 않는다.

경기도 일산에 사는 한수정(가명·32)씨도 부부 월소득 450만원으로 기준선을 비켜 갔다. 한씨는 "회사 월급도 안 오르는데, 차라리 그만두고 시간제로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며 정부의 보육 지원금 타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다.

본지 익명 토론에 참여한 각계 전문가들은 "소득과 고용이 안정적인 '라형'의 출산율을 끌어올리는 게 저출산 탈출의 관건"이라고 했다. 모두에게 소액을 뿌리거나 저소득층만 몰아주는 대신, 중산층이 기댈 수 있는 틀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가 "서구는 중산층도 꼭 필요한 복지 서비스를 싸게 누리게 하고, 저소득층은 거기서 더 깎아주는 구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