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배의 만두 이야기] 명절에 빠지지 않던 귀한 음식, 만두

귀하고 비싼 밀가루로 빚은 사치음식··· 선물이나 뇌물로 주고 받기도
작은 만두 여러 개 넣어 빚은 '대만두', 청나라 사신에게 "먹기 편하고 맛있다" 호평 받아
일제강점기 화교 운영 만두집 성업··· 1960년대 분식장려운동 이후 비로소 대중화

고려와 조선 시대 먹던 만두인 ‘상화’를 음식연구가 서명환씨가 재현했다. 왼쪽은 달게 맛을 낸 팥소를, 오른쪽은 고기와 채소를 소로 넣었다.

고려실록에는 충혜왕(忠惠王) 4년(1343년) 10월 25일 ‘어떤 사람이 궁궐 부엌에 들어가 만두를 가져가자 왕이 노하여 그가 도둑질했으니 즉시 죽이라고 명하였다'고 나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만두에 대한 기록은 이렇게 살벌하게 등장한다.

지금이야 만두가 중국집에서 공짜로 내주는 서비스 아니면 저렴한 분식집이나 길거리 메뉴, 집에서 쉽게 먹는 간식이지만 고려 말에서 조선 말기까지 만두는 양반들이 먹던 고급 음식이었다. 만두의 주 재료인 밀가루는 한반도 기후나 토질과 맞지 않아 국내에서 평안도·황해도·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만 농사가 가능했고, 이에따라 밀가루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귀하고 비싼 곡물이었던 까닭이다.

◇고려 팔관회·중국 사신 접대상에 반드시 오른 만두

고려 때 가장 큰 국가 행사였던 팔관회에 상화가 나온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상화(霜花)’ 즉 만두가 팔관회 때 왕에게 올리는 세 번째 안주로 등장한다. 고려와 조선 때는 만두를 상화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왕실 잔치에서도 만두는 반드시 등장했다.

손님 접대에도 만두가 빠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중국 사신 접대는 국가의 운명이 달린 중요한 일이었다. 청나라 사신 접대 때 나온 ‘대만두(大饅頭)’라는 독특한 만두가 있다. ‘한 대신(大臣)이 칼을 가지고 들어와서 큰 만두의 껍질을 갈랐다. 그 안에는 작은 만두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크기가 호도(胡桃)만 하여 먹기에 아주 좋았다’(한치윤 ‘해동역사(海東繹史)’)혔다.

이처럼 대만두는 하나의 커다란 만두 안에 작은 만두 여러 개가 들어있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9∼1618)은 우리나라 최초의 음식품평서 ‘도문대작(屠門大嚼)’도 썼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대만두를 ‘(평안도) 의주(義州)의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든다. 그 밖에는 모두 별로 좋지 않다.'라고 소개했다.

귀한 밀가루와 고기가 들어간 만두는 고관들의 미식이었던 탓에 고려와 조선 시대에 선물로 보낸 기록이 종종 보인다. 고려 문신 이규보(1168~1241)의 시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여름에 조정 우두머리인 수상(首相) 최시중(崔侍中)이 병든 이규보에게 보내온 술과 얼음과 ‘혼돈(餛飩)’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는 시가 나온다. 시에 등장하는 혼돈(餛飩)은 지금의 교자(餃子)만두를 말한다.

조선 중기 문신·학자인 안방준(1573~1654)이 쓴 당론서인 ‘혼정편록(混定編錄)’에는 이 ‘정인홍(조선 중기 학자·정치가)이 만두를 좋아하여 찾아가는 이들이 그에게 만두상(饅頭盤)을 반드시 바쳤던 까닭에 탄핵을 만나 떠나게 된 것이다’고 나와 만두가 뇌물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서울 은평구 진관사에서 합동 차례용으로 빚은 만두.

조선시대에 명절과 가례에 만두는 필수 음식이었다. 조선은 성리학이 지배한 나라였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1130~1200년)가 가정의례에 대해 말한 내용을 모은 '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조선의 가례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주자가례에는 만두를 제사에 올리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사대부들은 '한결같이 주자가례대로 했다(一依朱子家禮)'란 말을 입에 담고 살았다. 그러니 만두가 양반가 온갖 집안 행사에서 빠지지 않은 건 당연했다.

◇조선 말기 저렴해졌지만 진정한 대중화는 1960년대 분식장려운동 이후

조선 말기가 되면 만두는 돈 많은 양반들만 맛보는 귀한 미식에서 중인들도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대중화한다. 중인 출신 지규식이 1891년에서 1911년까지 쓴 ‘하재일기(荷齋日記)’에는 만두를 먹은 기록이 8번이나 등장한다. 이중 1897년 10월 27일 ‘청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다사(茶肆· 음식과 차를 파는 곳)에 들어가 이영균(李永均)과 만두 한 주발을 먹었다(喫饅頭一椀)’는 기록이 유독 눈에 띈다.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서울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를 따라 들어온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식 만두집이 서울에도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구한말과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만두는 호떡과 더불어 한국인들도 제법 즐기는 외식 음식으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만두의 진정한 대중화는 1960년대에 이뤄진다. 당시 정부가 추진한 분식장려운동 덕분이었다.

6.25 이후 베이비붐(1955년~1963년)과 1960년대 농촌 인구의 도시로의 이주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도시 인구는1955년 24.5%, 1966년 33.5%, 1975년 48.4%(통계청)으로 늘어난다. 이로인해 식량부족 사태가 발생하는 동시에 흉작이 거듭되자, 정부는 1962년에 분식장려를 공식적인 식생활개선 방향으로 추진한다. 당시 미국에서 공짜 아니면 저렴한 가격으로 들어온 밀가루는 '제2의 쌀'로 불리며 소비가 적극 권장된다.

학교 급식, 군대 식사에 빵과 우유가 기본으로 제공되었고 1963년에는 인스턴트 라면이 첫선을 보인다. 한국인보다 분식에 능한 화교들은 짜장면, 짬뽕, 만두를 당시 최고의 대중 외식으로 선보이며 높은 인기를 얻는다. 1969년 보사부가 분식 조리법을 전국에 보급하게 되면서 전국에 분식집이 급증한다. 분식집에서는 라면, 칼국수 같은 면에 만두를 기본적으로 취급하면서 만두가 서민들에게는 귀하고 낮선 음식에서 일상적으로 먹을 수 있는 전국민의 음식이 된다.

박정배는 한국, 중국, 일본 음식문화와 역사를 공부하고 글로 쓰고 있는 음식칼럼니스트다. 조선일보, 주간동아, 음식전문지 쿠켄 등에 오랫동안 음식 칼럼을 연재해왔다. ‘박정배의 음식강산’ 시리즈 3권 등 다양한 음식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