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미박스 하형석 대표가 세포라와 공동 개발한 ‘가자’ 제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가자는 ‘메이드 인 코리아’에 한국인 개발자가 총괄 디렉팅을 한 제품. 하 대표는 ‘K뷰티’ 대표 상품으로 키우겠다고 했다.

지난 13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로어맨해튼 골목에 핑크빛 기운이 가득했다. 파티에 온 듯한 복장의 젊은이들이 속속 들어와 핑크톤 화장품 패키지를 열고 볼과 입술을 핑크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프랑스계 세계 최대 뷰티 유통 기업 '세포라'와 국내 화장품 회사 '미미박스'가 공동 개발한 K뷰티 브랜드 '가자(Kaja)'의 공식 출시 현장이었다. 1969년 문을 연 세포라가 일반 화장품 회사와 제품을 공동 개발해 출시·유통하는 건 처음이다. "그동안 입점 계약서만 존재했던 세포라 측에서 계약서를 통째로 수정할 정도로 실험적인 일이었어요. 이 어려운 일이 K뷰티의 큰 파도를 타고 가능해졌네요." 미미박스 하형석(35) 대표의 말간 볼이 이 회사의 로고처럼 인디언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거대 공룡과 어떻게 손잡았나.

"최근 세포라에서 K뷰티 특집 코너를 열 정도로 K뷰티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하지만 제품을 수급하고 소비자들에게 알리는 데 어려움이 많은 듯 보였다. 마침 우리가 지난해 미국 소매점 1위 유통사인 얼타뷰티(ULTA)와 손잡고 선보인 마스크 팩이 대대적으로 히트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우리 본사와 미국 세포라 본사가 가까운 점도 유리했을 것 같다."

―K뷰티 하면 주로 스킨케어 쪽인데 '가자'는 메이크업 제품이다.

"세포라 본사에서 임원 20여명과 함께 회의를 했다. 그들은 미국 시장 뷰티 지형도를 그리면서 우리에게 '빈 곳을 개척하자' 했다. 가성비 좋은 제품을 빠르게 제조하는 한국 DNA를 바탕으로 10~20달러 정도의 메이크업 제품 시장을 평정하자는 계획이었다. 5개월 만에 47개 제품을 완성했다."

―원래 화장품을 좋아했는가.

"이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아는 게 없었다. 내 프로필상 국내 대기업에 들어가 고속 승진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주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남들처럼 뛰어난 머리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재미있으면서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K뷰티 관련 일을 하다 보니 애국심도 절로 커졌다."

하 대표는 경희대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하고, 미국 파슨스 디자인스쿨에서 패션을 공부했다. 뉴욕의 패션 브랜드 톰 포드와 국내 소셜커머스 업체 티켓몬스터를 거쳐 2012년 2월 미미박스를 창업했다. 미미박스는 처음에 일정한 금액을 내면 여러 화장품을 골라 배송해주는 '구독서비스'로 시작해 '아임 미미' '포니 이펙트' '누니' 같은 자체 제작 브랜드는 물론 국내 화장품 브랜드를 대거 입점시킨 온·오프라인 쇼핑몰 역할도 했다. 현재 아마존보다 많은 약 3만 개 이상의 뷰티 제품 정보가 축적돼 있다. 이용자만 월 약 5백만 명 이상. 뷰티업계의 구글로 불리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군대에서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지원한 것이 미국 시장에 눈뜬 계기라던데.

"기왕 군대에 가는 거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아프간에서 미국인을 처음 만났고 영어도 배웠다. 미군 동료가 미국에 가본 적 있느냐기에 '한 번도 없다, 너무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 친구 초대 덕에 뉴욕에 왔고, 지하철에서 올라와 처음 본 곳이 바로 타임스스퀘어였다. 영화 같았다. '딱 여기다, 돈도 뭐도 아무것도 없지만 난 여기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어릴 적부터 사업가가 꿈이었나. 대학 시절 군고구마 한철 장사로 중고차를 뽑을 정도로 돈을 번 적도 있다 했다.

"돈이 아니라 누구랑 같이 신나게 일할 수 있느냐만 생각했다. 미미박스가 400여명 규모의 회사로 크는 동안 창업 때부터 함께해온 공동 창업자와 1호에서 5호까지 직원 다섯 명이 버팀목처럼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뉴욕 맨해튼 제품 론칭 현장을 찾은 현지 뷰티 전문가들이 가자 제품을 발라보고 있다.

―2013년 미국 진출 당시 직원들을 '케네디 팀'이라 불렀다는데.

"케네디 대통령이 1962년 우주개발 관련 연설을 하면서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다. 쉬워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던 점에서 착안했다. 창업 초기 2년은 투자를 받지 못해 2억여원의 빚이 있었다. 공동 창업자와 '100만원씩 20년 가까이 꼬박 갚아야 하는데, 계속 하는 게 맞을까'라는 고민도 했었다. 어려운 만큼 간절했고,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에어비앤비, 드롭박스, 트위치 등을 키워낸 창업 사관학교 'Y콤비네이터' 지원 프로그램에 1위로 합격해 수백억원의 투자금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Y콤비네이터와 사무실을 같이 쓴다. 분홍색 화장품 가방을 들고 온 아시아 청년 이야기를 그들은 그냥 흘려듣지 않았다. 설립자인 폴 그레이엄은 아직도 멘토 역할을 해준다."

―처음 투자를 받았을 때 어땠나.

"인터넷으로 은행 계좌를 열어놓고 계속 리프레시(refresh·새로고침)를 눌렀다. 100억원 이상 들어온다고 했는데 언제 들어오느냐며 초조해하다 태어나 보지 못했던 '0'의 행렬을 봤다. 축배? 막상 숫자를 보니 '큰일 났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당장 일하러 가야겠다는 깨달음이 절로 왔다."

―지금껏 1700억원 정도 투자를 받았다. 성장성, 잠재력, 본인의 매력 같은 다양한 요소가 있겠지만 투자자들을 설득한 가장 큰 건 무언가.

"본인의 매력밖에 없다(웃음). 투자자들이 어느 날 저한테 독재자라고 하더라. 1호 직원은 6년째 매일 밤 11시까지 일한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게 아닌데 본인이 몰입해 거의 인생이 회사와 동기화된 듯하다. 좋아서, 미쳐서 빠져들며 일하는 매력을 그들은 높이 산다. 투자자들이 미팅에 들어오기 전에 항상 꿈꾸는 게 있단다. '이 창업자가 열정이 넘치고 모든 게 가능하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굉장히 외향적인 성격인가 보다.

"어딜 가나 내가 필요한 사람이 돼야겠다는 열망이 컸다. 아프간에서도, 회사에서도 영웅심이나 혜안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어진 밥그릇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했을 뿐이다. 내가 모자란 구석이 느껴질 땐 나보다 전문가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계속 얘기를 들었다."

―어떤 방식이었나.

"신문 기사를 정말 열심히 읽었다. 기사 속 전문가 멘트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을 거 같았다. 기자들 이메일로 연락해 취재원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예를 들어 넥슨 김정주 창업주가 '한국 스타트업들이 충분히 시도하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한 기사 속 깊은 뜻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기자님께 연락했고, 김 회장님에게 제주도로 만나러 오란 답을 들었다. 배낭 메고 있던 첫인상이 아직도 강한데, 억만장자인 그분 가방 밑에 구멍이 나서 칫솔이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8시간 등산을 한 뒤 첫 마디가 '왜 오셨나요. 돈이 필요하신가요'였다. 기사 내용이 궁금해서 왔다고 말했더니 의외라고 생각하시는 거 같았다. 나중에 들었는데 자기한테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돈 때문이라 하더라. 지금도 각종 조언을 해주신다."

―월급은 어느 정도 받는가.

"우리 회사에서 중간 정도 수준이다. 우리 회사는 전 직원에게 재무제표 공개를 한다. 손실 나는 부분은 스스로 알아서 줄이는 의사결정권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CEO와 직원의 차이는 일부 정보의 접근 수준일 뿐이다. 정보가 그들에게도 똑같이 제공된다면 누구든 CEO가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