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 더위도 조금씩 힘이 빠지고 있다. 서울에서도 얼마 전부터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바람이 불 때면 언제나 조금은 쓸쓸한 느낌에 잠긴다. 오늘은 바뀌는 계절의 느낌을 전하는 20세기 전기의 그림엽서첩을 소개한다.

‘사랑스러운 압록강 노래-신민요 국경정서’라고 적힌 1920년대 그림엽서첩. 철교 아래 뗏목을 타는 벌목꾼들의 풍경이 압록강의 여름 명물이었다. 뜨겁던 여름이 끝나가고 선선한 가을로 접어들자 대륙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안둥(단둥의 옛 이름)과 신의주 사이 강가에 빨간 머플러를 두른 여성의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이 엽서첩의 제목은 '사랑스러운 압록강 노래-신(新)민요 국경 정서'다. '신민요 압록강 노래'란 1910~20년대에 일본에서 유행한 가요 '오룟코부시(鴨綠江節)'를 뜻한다. 당시 압록강의 여름이라고 하면, 백두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뗏목을 만들어 강 하구의 조선 신의주와 중화민국 안둥(安東)까지 타고 내려오는 벌목꾼들이 명물이었다. 그들이 부르던 노동요(勞動謠)를 가요로 만든 것이 일본 전역에서 '오룟코부시'라는 이름으로 히트했다. 안둥시는 오늘날 북한과 중국 사이의 무역 도시인 단둥시의 옛 이름이다.

그림엽서첩 겉봉에는 압록강을 항해하는 배를 통과시키기 위해 회전하도록 설계된 압록강철교와, 압록강 위에 떠 있는 유람선이 그려져 있다. 여름날 압록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압록강철교 오른쪽에는, 언제부터인가 불어오기 시작한 대륙의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코트와 목도리로 몸을 감싼 여성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이 엽서첩의 표지 디자인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전환점에 국경의 강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을 전하고자 했던 듯하다.

1920년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제작한 안둥시(단둥시의 옛 이름) 팸플릿. 당시 압록강의 풍물이었던 철교와 뗏목이 그려져 있다.

반세기 전에 압록강에 존재했던 이러한 국경 정서를 오늘날에 전하는 것이, 식민지 시대 신의주에 살았던 작가 전혜린의 '홀로 걸어온 길'이라는 글이다. 이 글에서 그는, 여름 압록강을 가득 채운 뗏목 위의 벌목꾼에 대한 기억을 적고 있다. "집채보다 더 큰 뗏목에는 수명의 남자가 타고 있었고, 모두 검붉게 탄 건장한 체구들이었으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벌목꾼들의 뗏목이 안 보이게 될 때까지 부둣가의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서 바라보던" 그는 "어디론지 멀리멀리 미지의 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전혜린 선생의 글을 떠올리며 그림엽서첩 국경 정서를 볼 때마다, 이 엽서첩 속에 그려진 여성이 전혜린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일본의 일부였던 식민지 조선의 신의주와 중화민국의 안둥 사이에 놓인 압록강은, 이처럼 짙은 국경 정서를 띠며 흐르던 강이었다. 국경의 강 압록강 남북 쪽에는 조선인과 한인(漢人), 만주인, 일본인, 그리고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피해 망명한 백계(白系) 러시아인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 오늘날 이곳에서 일본인과 러시아인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안둥이 이름을 바꾼 단둥에서는 여전히 한인, 만주인, 몽골인, 북한인, 남한인이 부대끼며 살고 있다. 이들의 열망과 애환을 품고 지금도 압록강은 국경을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