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서울 용산 재개발사업과 관련한 시위진압 과정에서 철거민과 경찰특공대원이 사망한 '용삼참사'는 안전조치가 부실한 상태에서 무리한 진압을 지시한 당시 경찰 지휘부에 책임이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는 5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경찰지휘부가 안전 대책이 미비했지만, 진압을 강행했다"며 "(진압과정에서) 순직한 경찰특공대원과 사망한 철거민 등에게 사과를 하고, 유사사건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5일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용산참사와 관련해 당시 경찰지휘부가 안전 대책이 미비한 상태에서 진압을 강행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사진은 용산참사 현장의 모습

용산참사 사건은 2009년 1월19일 철거민 32명이 용산 남일당 빌딩 옥상에 망루를 세우고 농성을 시작하자 이튿날 새벽 서울경찰청 경찰특공대가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철거민과 경찰특공대원 6명이 숨지고 30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조사위는 당시 경찰이 철거민들과의 충분한 협상 노력 없이 진압작전을 개시했다고 판단했다. 특공대원은 철거민들이 농성을 시작한 지 25시간만인 20일 오전 6시30분쯤 옥상으로 투입됐다. 경찰 지휘부는 농성자들을 '범죄자', '꾼' 등으로 지칭하며 협상의 여지가 없는 진압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당초 세워진 작전계획에 따르면 우발상황을 대비한 안전장비로 300톤(t)급 크레인 2대와 에어매트 3개, 소방차 6대 등이 필요하다고 적시돼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100t 크레인 1대만 왔고, 에어매트는 제대로 설치되지 않았다. 고가사다리차와 유류화재 소화에 유용한 화학소방차는 현장에 오지도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한 당시 경찰특공대 제대장은 "작전이 불가능하니 작전을 연기하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서울청 경비계장은 "겁 먹어서 못 올라가는 것이냐"며 거절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특공대가 옥상에 진입하자 농성자들이 화염병을 던지는 등 저항하는 과정에서 1차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특공대원들은 소화기를 교체하지도 못한 채 2차 진압에 투입됐다.

경찰은 또 현장에서 사망자를 발견하고도 16시간 이상 지난 후에야 유가족들에게 사체 확인을 해줬을 뿐, 부검의 필요성 등에 대해 통지하지 않고 유족들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부검을 진행했다.

사건 발생 이후 경찰 조직을 동원해 여론을 조성하기도 했다. 전국 사이버수사요원 900명에게 1일 5건 이상의 반박글을 올리고 각종 여론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지시했다. 경찰 내부 문건으로 확인된 바로는 1월24일 게시물과 댓글 약 740건, 여론조사와 투표 참여는 590여건이 이뤄졌다.

사건의 파장이 커지고 경찰 지휘부가 검찰에 기소될 위기에 처하자 다른 사건을 통해 물타기하려는 시도도 포착됐다. 당시 청와대 행정관은 경찰청 홍보담당관에게 강호순 연쇄살인사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고 이메일을 보낸 사실도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