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현 미술가·이화여대 교수

유년시절을 강원도 소읍에서 보낸 덕분에 고운 추억이 많다. 그중 하나가 여름이면 영화가 동네에 '들어오던' 일이다. 예전엔 극장이 드물어 보따리 영화상들이 지방 마을을 방문, 공터에 장막을 치고 며칠 밤 영화를 상영했다. 풀이 무성한 흙바닥, 장막 위 칠흑의 하늘엔 별들이 쏟아지고, 이따금 바람이 옆 사람들 살내음을 전해주던 친환경 극장. 영화는 대체로 재탕이어서 중간에 자주 끊기고 비가 줄줄 내리는 흑백 화면임에도 사람들은 몰입하여 때론 분개하고 때론 울음바다였다가, 주인공이 고난을 이겨낼 땐 뜨거운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이는 후일 보게 된 이탈리아 영화 '시네마천국'의 장면들과 흡사하다. 영상 속을 헤매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들어 집으로 돌아오던 길 엄마 등에서 깨기 일쑤였다. 그때 도란도란 이웃과 정담을 나누심에 엄마 몸의 진동을 타고 전해지던 목소리, 그 주파수는 몹시도 익숙하고 편안하여 나를 까마득한 원초의 세계로 데려가는 듯했다. 무아지경 속에 혹시라도 내려 걸어가자 하실까 겁나 여전히 자는 척 실눈으로 돌아보면 까만 밤에 신작로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가라앉았던 그 기억이 다시 떠오른 건 지난 5월 이화여대 교정을 무대로 한 야외상영 영화제에서다. 숲속 스크리닝에 젊은 세대의 호응이 뜨겁다 못해 영화가 끝날 때 박수갈채가 쏟아져 주최 측인 나를 감격하게 했는데, 영화나 게임 등 온갖 가상경험이 흔해진 요즘 진기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탁 트인 자연환경에 입체적인 감각의 장이 마련되어 마음이 활짝 열렸을 것이다. 기실 그럴 때 영화는 뭐든 상관없다. 봄날 밤, 피부에 닿는 바람과 그것이 실어오는 싱그러운 신록의 냄새, 그리고 소음 등 미묘한 요소들로써 자극되는 현존감이 빛의 영상과 만나 본능적인 감동의 불꽃을 살려내니까.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뜨거운 갈채는 우리 스스로의 싱싱한 실존에 보낸 것이리라.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야릇하게 만들지라도 아직 우린 괜찮아. 영화제를 끝내고 교정을 빠져나오던 깊은 밤에 아스팔트 길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