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서울 어느 곰탕집 남매가 소송을 벌였다. 웬만한 미식가는 안다는 집이었다. 동생이 치매 걸린 팔순 아버지를 은행에 데려가 돈을 빼갔다고 오빠가 소송을 걸었다. 동생은 동생대로 "오빠가 다 가지려 한다"고 맞섰다. 판사가 "둘이 똑같이 아버지를 부양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재산을 건드리지 말라"고 중재했지만 듣지 않았다. 결국 법원이 아버지 재산을 지킬 성년후견인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앞서 유명 재벌가 형제도 비슷한 경영권 다툼을 벌였다. 형은 "아버지의 판단력은 또렷하고 나를 후계자로 지목했다"고 했다. 그러나 법정에 나온 창업자 아버지는 판사 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했다. 오랫동안 치매 약을 복용해온 사실도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로펌이 후견인이 돼 창업자의 재산 관리, 부동산 처분, 소송 진행을 맡고 있다.

▶옛날엔 장애·질병·노령으로 사리 분별이 안 되는 사람에게 법원이 법률대리인을 지정해주는 금치산·한정치산제도가 있었다. 5년 전 법을 고쳐 성년후견제도가 됐다. 재산 관리 말고도 치료·요양 같은 피(被)후견인 신상 보호로 개념이 확대됐다. 후견인 개입 범위에 따라 성년후견·한정후견·특정후견으로 나뉘고, '나중'에 대비해 유언장 쓰듯 미리 후견인을 정해두는 임의후견도 있다. 재벌 후계자 재판을 계기로 관심이 높아져 해마다 후견 신청이 갑절로 늘어난다. 고령화로 치매 환자가 늘어나는 것도 요인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10여년 먼저 성년후견제를 도입했다. 몇해 전엔 총리가 위원장을 맡고 장관들을 두루 참여시켜 '제도 이용 촉진회의'도 만들었다. 지역별로 민간이 참여하는 후견센터도 뒀다. 국가와 지역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일로 여긴 것이다. 일본에서 치매 환자들 금융자산이 2030년이면 GDP의 40%, 215조엔(약 2158조원)에 달할 거라고 한다. 그 엄청난 돈이 묶이면 나라 경제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경고다.

▶우리 고령화 속도도 세계 최고다. 2015년 65만명이던 치매 환자가 2025년 100만명을 넘는다는 예측이다. 우리도 일본처럼 막대한 치매 환자 돈이 묶여버릴 수 있다. 성년후견제는 그 미래에 대비해 구축해둬야 하는 사회 안전망이다. 출발은 늦었지만 지난해 뜻있는 전문가들이 후견협회를 만들었고, 두 달 뒤 서울에서 세계후견대회도 열린다.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를 돕는 것만한 복지정책도 없다. 평균 수명이 90세를 넘어가려는 지금이지만 법과 제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