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38년간 독점해온 '전속고발권'을 포기하고, 검찰과 권한을 공유하게 됐다. 앞으로 중대한 담합(경성 담합)에 대해선 공정위가 고발하지 않더라도 검찰이 독자적으로 수사·기소할 수 있게 된다. '경성(硬性) 담합'이란 가격 담합이나 입찰 담합, 공급 제한, 시장 분할 등 위법성이 큰 담합을 말한다. 또 그동안 담합 내부자의 신고(리니언시) 정보는 공정위가 독점했는데 이 정보도 공정위와 검찰이 실시간으로 공유하게 된다.

박상기(왼쪽) 법무부 장관과 김상조(오른쪽) 공정거래위원장이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공정거래법 전속고발제 폐지 합의문’에 서명한 뒤 합의서를 교환하고 있다. 이날 양측은 서명식에“전속고발제 개편으로 공정한 시장질서를 만들겠습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검찰의 기업 수사권 확대

공정위와 법무부가 권한을 공유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검찰이 담합 사건 수사권을 독점하게 됐다는 분석이 많다. 검찰이 개입할 수 있는 '중대한 담합'의 경계가 모호해, 검찰의 무한 개입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정위가 지난해 '과징금 이상' 행정처분을 내린 담합 사건은 51건이었는데 모두 가격 담합 등 중대한 담합이었다. 최근 3년간 통계를 보면 157건 중 156건이 중대한 담합 사건이다. 이에 대해 법무부는 "공정위와 상시적 협의체를 구성해 (수사 대상을) 정할 것"이라고 했지만 최근 재취업 비리로 검찰 수사를 받은 공정위가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업들, "수사기관이 두 곳으로 늘어"

이번 합의안은 교수·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공정거래법 전면 개편 특별위원회의 권고안보다 검찰 쪽 주장을 더 반영했다. 특위 권고안에서는 '전속고발제를 유지·보완하자'는 견해가 '중대한 담합에 한해 부분 폐지하자'는 견해보다 약간 많았다. 리니언시 제도에 대해선 공정위가 운영하되 관련 정보를 검찰에 제공할 수 있도록 하자고 권고했다.

정부는 기업 담합행위에 대한 조사기관이 2곳으로 늘어난 만큼 기업 담합행위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들은 "공정위 한 곳도 버거운데 저승사자 2명을 모시게 된 격"이라며 부작용을 걱정하고 있다. 대기업의 한 임원은 "수사권을 가진 검찰이 담합 건만 보겠느냐. 리니언시 정보 등을 바탕으로 별건 수사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기업에 대한 검찰 수사권이 확대되면 경영 상황이 비교적 투명한 대기업보다 중견·중소기업들이 피해를 볼 것이란 우려도 있다. 공정위에 접수되는 불공정 거래 신고의 80% 이상이 중소·중견기업 관련 신고이기 때문이다.

한편 전문가들은 기업들의 자진 신고가 줄어들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자진 신고한 기업 입장에서는 공정위의 행정처분을 감면받더라도 검찰에서는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불확실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호영 한양대 로스쿨 교수는 "담합 사건의 70%는 내부 고발자 덕분에 적발한다"며 "형사처벌을 감면하는 제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을 경우 내부 고발자가 급감할 수 있다"고 했다.

◇공정위 침통… 자초한 측면도

공정위는 침통한 분위기다. 검찰의 재취업 비리 수사로 전직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구속된 데 이어, 독점하고 있던 핵심 권한도 검찰에 넘겨줘 위상 추락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공정위의 한 간부는 "새 정부 들어 경제 민주화, 재벌 개혁, 갑질 근절 대책을 몰아치며 핵심 부처로 기대를 받았는데 순식간에 비리 집단으로 떨어지더니 법 집행 권한도 잃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속고발제' 폐지가 공정위가 자초한 결과라는 비판도 있다. 그동안 공정위는 고발권을 소극적으로 행사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최근 3년간 과징금 이상 처분한 담합 사건 157건 중 공정위가 검찰에 고발한 것은 58건에 그쳤다. 한편 야당은 "우리와는 전혀 협의가 없었다"며 법 개정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전속고발제

공정거래 관련 법 위반 사건은 공정거래위원회에만 고발권을 인정하는 제도. 잦은 형사 고발로 기업 활동이 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문 행정기관인 공정위를 거쳐 검찰에 고발하도록 한 것이다.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가맹사업법 등 6개 공정거래 관련 법에 전속고발제가 규정돼 있다.

☞리니언시

담합행위를 한 기업이 자진 신고를 할 경우 처벌을 경감하거나 면제하는 제도. 현행 공정거래법은 자진 신고를 유도하기 위해 리니언시 정보를 비밀에 부치도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공정위가 리니언시 정보를 독점하면서, 이를 활용해 기업을 봐준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