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열 청춘상담소 '좀 놀아본 언니들' 대표

최근 대학생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한 저학년 학생들과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워크숍이다. '제발 나가서 뭐라도 해라'고 엄마가 억지로 보낸 친구들이 많아 '수업 같지 않고 놀러 오는 기분'으로 함께하기로 했다.

"이번 주는 과제 있어요." 두 번째 수업을 마칠 때 말을 꺼냈다. '뭐지, 이 배신감은?'이라는 표정을 못 본 척,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책을 20권 정도 골라서, 날개만 읽으세요. 30분이면 돼요." 부담 없는 내용에 비로소 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관심이 가는 책을 무작위로 고르고, 저자는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훑어보는 것. 그리고 가장 멋지다, 닮고 싶다 싶은 한 명을 골라오는 것. 그게 다였다.

한 주 뒤 모인 학생들. 불과 지난주까지 "뭘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입 모아 말했건만, 책날개로 엿본 '되고 싶은 삶'은 아무도 겹치지 않았다. 누군가는 의학 지식을 영화·미술 작품에 비유해 풀어낸 의사의 '통섭 능력'에 매료되었고, 어떤 아이는 퇴사 후 유명 셰프들의 가게 앞에 텐트를 쳐가며 기다려 배운 요리책 저자의 '결단'이 멋있다고 했다. 모녀간의 지독한 애증을 심리학으로 풀어낸 책을 고른 아이도 있었다. 알고 보니 저자의 본업은 간호사라며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2의 직업을 만들어낸' 사실에 감복했다고 말했다. 10명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17년 전 미술학도 시절, 은사님이 해주신 말이 떠올랐다.

"모작(模作)부터 해. 뭘 따라 그리고 싶은지 골라보고, 일단 그려. 그러다 보면 자기 그림체가 나오는 거야. 어느 날 뿅 나오는 게 아니라고."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무것도 보지 않은 아이에게 도화지는 막막하다. 먼저 간 걸음을 들여다보고, 감탄도 동경도 해보는 것. 자기 유형의 '인생 취향'을 알아 가는 게 우선 아닐까. 여러분 곁에도 고민 가득한 청춘이 있다면, 책 한 권 선물해 보는 건 어떨까. 읽어야 한다는 부담의 눈빛을 보내거든 말해주는 거다. "날개만 읽어도 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