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찌민=김경필 특파원

지난 2016년 11월 말레이시아 정부와 중국 국영기업인 중국교통건설은 말레이시아 최대 항구인 클랑항(港)에서 출발해 말레이시아 최북단까지 이어지는 688㎞짜리 철도를 건설하는 협약을 맺었다. 동부해안철도(ECRL) 사업이라고 불리는 이 사업은 당시만 해도 중국이 야심 차게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구상의 큰 승리로 여겨졌다.

ECRL은 말레이시아 북부에서 태국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철도와 연결되고, 태국 철도 북쪽 끝에선 라오스 북부를 관통해 중국 윈난성 쿤밍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새로 건설될 예정이었다. 또 철도와 나란히 석유·가스 파이프라인도 놓일 예정이었다. 모두 완공되면 중국은 인도양에서 믈라카 해협 입구에 있는 클랑항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 사업은 현재 곳곳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5월 정권 교체에 성공한 말레이시아 신정부는 '중국에만 득이 되는 이상한 거래'라며 ECRL과 석유·가스 송유관 사업을 전격 중단시켰다. 태국은 사업비가 많이 든다며 철도 복선화 구간을 대폭 축소했다. 이에 일대일로 철도의 태국 구간 물류 수용량이 반 토막 났다. 라오스 북부 철도 사업은 예정대로 착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라오스가 국내총생산(GDP)의 약 40%에 달하는 58억달러(약 6조5200억원)의 빚을 지게 됐다.

대표적 친중 국가인 파키스탄과 미얀마에서조차 일대일로 사업은 고사(枯死) 위기다.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CPEC) 사업은 파키스탄 과다르에 대규모 항구를 조성하고, 이 항구에서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카스(喀什)까지 도로와 철도, 가스·송유관을 건설하는 대규모 계획이었다. 사업 규모는 일대일로 중 가장 많은 620억달러(약 69조7200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최근 파키스탄은 외환보유액이 고갈되면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 신청을 검토하고 있다. 서부 차우퓨항을 확장해 중국 쿤밍과 연결하기로 했던 미얀마도 최근 사업 규모를 73억달러(약 8조2100억원)에서 13억달러(약 1조4600억원)로 축소한다고 밝혔다.

개도국에 빚 폭탄 안긴 中 일대일로

2013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일대일로 구상을 내놨을 때만 해도 개발도상국들은 두 손 들어 환영했다. 철도·항만 등 인프라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절실했던 개도국들에 중국이 '전주(錢主)'가 돼 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지난해 2월 보고서에서 2016~2030년 아·태 지역 개도국 24국(중국 제외) 인프라에 매년 평균 5030억달러(약 566조원)가 투자돼야 하는데, 실제 투자 금액은 61%인 3080억달러(약 346조원)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개도국들이 경제적으로 너무 취약하거나 국가신인도가 낮아서 또는 독재나 인권 탄압을 이유로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어서 투자를 제대로 못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이런 나라들에 약속한 투자 금액은 1조달러(약 1125조원)에 달했다.

하지만 일대일로 사업에는 '빚 폭탄'이란 함정이 숨어 있었다. 사업 대부분이 중국이 협력국에 차관 형태로 자본을 제공하면 이 자본이 다시 시공사인 중국 업체에 대금으로 지급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더라도 협력국은 사업비만큼 중국에 빚을 지게 돼 있었다. 지난 3월 개발원조 전문 싱크탱크인 글로벌개발센터(CGD)는 일대일로 협력국 68국 가운데 23국이 대(對)중국 부채로 취약해졌고, 이 가운데 파키스탄·라오스·키르기스스탄·몽골 등 8국은 심각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4월 리뤄구(李若谷) 전 중국수출입은행장은 "일대일로 참여국의 부채 비율이 GDP 대비 126%에 달한다"고 밝혔다.

개도국엔 남는 게 없는 일대일로 사업

수익성이 낮은 사업에 과잉 투자가 이뤄지는 경우도 많았다. 스리랑카는 연간 4000척 가까운 배가 입항하는 콜롬보항을 두고 중국으로부터 3억700만달러(약 3500억원)를 빌려 2010년 함반토타항을 새로 개발했다. 파키스탄은 2006년부터 중국 돈으로 과다르항을 대형선 13척이 한 번에 정박할 수 있는 항구로 개발하고 있다. 스리랑카와 파키스탄의 자체 수요만으로는 이 정도의 규모가 필요 없었다. 이 설비들은 일대일로가 순조롭게 진행돼 중국으로 통하는 혈관의 말단이 됐을 때 비로소 수익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일대일로가 곳곳에서 삐거덕거리자 이 항구들은 국가 재정을 축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함반토타항은 개항하자마자 한 해 30여 척의 배만 드나드는 실패작으로 드러났고, 과다르항도 지난해까지 매달 1~2척만이 찾는 한가한 항구가 됐다.

또 일대일로는 현지 업체가 아니라 중국 업체들이 돈을 벌어가는 구조다. 예컨대 말레이시아 ECRL 사업과 가스·송유관 사업은 각각 사업비의 85%가 중국수출입은행 대출로 조달되고 시공은 모두 중국 업체가 하게 돼 있었다. 지난 1월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아시아·유럽 34국의 일대일로 관련 사업을 조사한 결과, 전체 공사의 89%를 중국 기업이 진행하고 있었다. 더구나 중국 업체들은 현지 인력이 아니라 중국인을 고용했다. 그래서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안 됐다. 파키스탄의 다이메르-바샤댐 사업은 건설 인력 1만7000여 명 대다수를 중국인으로 충원할 계획이었다.

사업 32%가 '문제 상황'… 중국은 실탄 떨어져 가

미국 컨설팅 업체 RWR은 진행 중인 일대일로 사업 1814건 가운데 270건(15%), 총 사업 규모 가운데 32%가 타당성 논란에 휘말렸다고 분석했다. 일대일로 협력국들은 정치적인 부담까지 지고 있다.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파키스탄에선 중국과 공조해 일대일로 사업을 벌인 친중 정권들이 잇따라 무너졌다. 태국 군사정권과 인도네시아, 미얀마 정부는 국내 비난 여론이 커지자 사업 재조정에 나섰다.

일대일로의 좌초를 막기 위해선 중국의 사업 방식 변화가 불가피하다. 중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구조를 포기하고 협력국들에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그럴 여력이 별로 없다는 점이 일대일로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중국의 총부채는 2008년 GDP의 140%에서 지난해 257%까지 팽창했다. 중국 상무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일대일로 관련 55국에 대한 중국의 직접투자액은 76억8000만달러(약 8조6400억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5% 줄었다. ICBC스탠더드은행의 지니 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이 국내에서 빚 줄이기 캠페인에 박차를 가할수록 일대일로와 관련해 고위험 국가들이 진 부채를 점점 더 면밀히 조사할 것"이라며 중국이 개도국들에 대해 채무 상환 압박에 나설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