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들께서 하늘나라에서라도 가슴에 훈장을 달아보며 좋아하고 계실 것만 같습니다."

독립운동 명문가 중 하나로 꼽히는 고(故) 강명화 애국지사 가문에 3개의 훈장이 뒤늦게 전수됐다. 국가보훈처는 14일 서울지방보훈청에서 강명화 지사의 아들 영대(1남·2013년 애족장), 영문(3남·2012년 애족장), 영상(4남·2013년 대통령표창)선생의 미전수 훈장을 그들의 조카인 수잔 강(74·하와이 호놀룰루 거주)씨에게 전달했다.

14일 미주지역 최대 독립운동 명문가인 강명화 애국지사 가문 후손들이 미전수 훈장을 받고 피우진(왼쪽에서 셋째) 국가보훈처장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들은 2012~2013년 훈장 추서 결정이 내려졌지만, 이미 숨지고 후손을 찾을 수 없어 훈장 전달이 미뤄져 왔었다. 강명화 지사 가문은 총 7명이 독립운동 포상을 받았다. 강명화 선생에게는 2012년 애족장이 추서됐다. 그의 아들인 영소(2남·2011년 독립장), 영각(5남·1997년 건국포장)과 사위 양우조(1963년 독립장) 선생도 수훈됐다.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가문(9명 포상), 이회영 선생 가문(8명 포상)과 비교될 정도지만, 3명에 대한 훈장 전수가 늦어져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 출신인 강명화 지사는 1905년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 총회장을 맡으며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그의 아들 영대·영소·영문·영상·영각과 사위 양우조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흥사단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강명화 지사의 5남 강영각과 3남 강영문, 2남 강영소(왼쪽부터) 선생이 1931년 미국 시카고에서 촬영한 사진.

이 중 강영각 선생은 1921년 해외 한인사회 최초의 영자신문으로 평가받는 'The Young Korean' 발행인 겸 주필을 지냈다. 이 신문은 1923년 10월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전하며 영문과 함께 한글로 '슬푸다. 압푸다'라고 기록했다. 우리말로 동포에 대한 애도(哀悼)를 표한 셈이다.

수잔 강씨는 'The Young Korean'과 아버지가 발행한 다른 영자신문 'American Korean(韓美報)' 등 두 신문의 원본 59부, 하와이 한인청년단체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 등 총 382점을 13일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모두 최초로 세상에 공개되는 자료이다.

강영각 선생의 부인 매리 강은 작고한 2011년까지 남편의 유품인 이 사료를 간직해왔다고 한다. 이후 아들·딸들이 보관하다 올 4월 강명화 지사의 외증손자로 한국에 있던 양인집(61) 전 하이트진로 사장에게 연락해 "자료를 하와이주립대에 기증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양 전 사장은 "하와이가 아니라 한국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후 양 전 사장은 자료기증 문제로 국가보훈처와 연락하던 중 영대·영문·영상 선생이 2012~2013년 건국훈장 수훈 대상자로 선정됐지만, 후손 파악이 안 돼 전수가 안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잔 강씨는 "대한민국과 국민의 미래를 위한 소중한 자산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