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학 교수는 “삼국통일기의 역사는 ‘신뢰가 없는 사회는 허망하다’는 것을 일깨운다”고 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엔 '강대국인 고구려가 통일했더라면 우리는 강성한 나라로 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약소국은 마땅히 강대국에 굴복해야 한다'는 패권주의적 정서 아닙니까? 왜 우리가 이런 사고를 추종해야 합니까?"

역사학자인 이도학(61) 한국전통문화대 융합고고학과 교수가 새 연구서를 냈다. 600쪽 분량의 '삼국통일 어떻게 이루어졌나'(학연문화사)다. 삼국·가야·후삼국 관련 저서 23권을 낸 이 교수지만, 1991년 한양대 대학원에서 '백제 집권국가 형성과정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새로 쓰는 백제사' '백제 도성 연구' 등의 책을 쓴 데다 재직 중인 학교가 충남 부여에 있어 아무래도 '백제사 전공'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 그가 뜻밖에도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책을 쓴 것은 왜일까.

이 교수는 "그동안 우리는 약소국인 신라가 강국인 백제와 고구려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다"며 "백제가 이미 망하고 고구려도 멸망하기 직전인 668년 6월에 신라의 김유신이 아우와 생질에게 한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금 신라는 충성과 믿음 때문에 생존했고(今我國以忠信而存), 백제는 오만 때문에 망했으며(百濟以慠慢而亡), 고구려는 교만 때문에 위태롭다(高句麗以驕滿而殆)'는 얘기였다.

이것은 멸망 당시 군사력을 비롯한 백제와 고구려의 물질적 토대가 취약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근본적인 멸망 원인은 '정신력'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백제의 의자왕은 당 현종 '개원(開元)의 치'에 못지않게 선정을 베풀던 재위 15년까지 안정의 시기가 있었다"고 했다. 의자왕은 정변을 단행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고 신라를 공격해 100여 성을 점령했는데, 이는 광개토대왕이 정복 전쟁으로 탈취한 64성을 훨씬 넘어서는 수치였다. 그러나 절정의 순간 오만과 향락에 빠져 신라와 당나라의 동시 침공을 대비하지 않았다. 당 태종의 침략을 안시성에서 막아낸 고구려 역시 연개소문 독재 권력의 교만으로 국가를 나락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그럼 약자인 신라는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가? "김유신이 말한 충신(忠信)이 무엇이었는지 분석해야 합니다. '충'이 종적인 관계라면 이것을 횡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존재가 '신'이지요. 한마디로 종횡으로 탄탄한 사회를 구축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라는 백제·왜·고구려·당나라와 20년 가까이 이어진 장기전을 벌인 끝에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아무리 풍요를 누리는 사회라 하더라도 갈등과 분열이 극심하면 대단히 위험하다"며 "사회적 통합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통일을 논하는 것 자체가 구두선에 불과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오만과 교만은 강자가 약자에게 먹히는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이 교수는 "신라가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일찍부터 바다의 중요성을 깨쳤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7세기에 이르면 국방부 격인 병부와 대등한 선부(船府)를 독립 설치하는데, 이는 대한민국이 1996년에야 해양수산부를 신설한 것과 비교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