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현 논설위원

지난달 양제츠 중국 공산당 정치국원의 극비 방한(訪韓)이 의심스럽다. 중국에서 '지도자'로 불리는 정치국원(총 25명)이 비밀 외유를 떠났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다. 마오쩌둥 시대도 아닌데 '중앙외사공작위원회 주임'이라는 명찰을 단 중국 외교 수장이 북한도 아닌 주변국을 몰래 다녀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한·중 모두 공개하기 껄끄러운 주제가 다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국내 보도처럼 종전(終戰) 선언이나 사드(THAAD) 보복 해제 등이 논의됐다면 비공개로 할 이유가 없다. 청와대 설명대로 사드 보복 해제는 작년 말부터 정부가 중국에 줄곧 요청해왔다. 종전 선언도 중국이 정전(停戰) 협정 당사자인 만큼 동참한다고 했을 것이다. 실제 왕이 외교부장은 2일 ARF(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 "종전 선언은 모든 국가 국민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양제츠가 종전 선언을 빌미로 '사드 철수'를 압박했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한반도에 전쟁이 끝났는데 북한 핵·미사일을 막는다는 사드가 왜 필요하냐고 따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교 소식통은 "중국이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 정부가 바라는 연내 종전 선언과 사드 보복 해제를 주려 하겠느냐"며 "지금도 중국은 사드 철수를 가장 원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의 판문점 선언 100일 자평(自評)대로 '평화가 일상화'됐고 '무력 충돌 요인이 철폐'됐다면 사드를 빼는 게 맞는다고 중국은 주장할 수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6일 "종전 선언이 사드 배치가 불필요하다는 논리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안보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남북, 미·북 정상회담 뒤에도 '북이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유엔 안보리 보고서가 지난 3일 나왔다. 북이 핵 신고서 제출 등 비핵화 조치에 나선다 하더라도 남한을 겨냥한 탄도미사일 1000여 기의 위협은 그대로 남는다. 폭염 속 에어컨에 귀뚜라미 그린다고 가을이 빨리 오나. 섣부른 종전 선언은 중국의 '사드 철수' 압박을 부르는 빌미가 될 수 있다. 중국은 중국인 단체 관광과 롯데그룹 제재 등 사드 보복 골격을 여태껏 유지하고 있다.

올 6월 김정은 3차 방중(訪中) 때 시진핑 주석은 '3가지 불변'을 약속했다. "국제 정세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북·중 관계를 발전시킨다는 입장과 북한 인민에 대한 우호, 사회주의 북한 지지는 불변"이라고 했다. 특히 '사회주의 북한'이란 말이 눈에 띈다. 북이 자본주의 미국에 붙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북을 지켜주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3차 방중 이후 미·북 비핵화 협상은 답보 상태에 빠진 반면 북·중 교역은 유엔 안보리 제재의 담장을 넘나들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단체 관광객이 서울 대신 평양으로 몰려가고 중국 발전기가 평양 밤을 밝힌다는 보도가 나왔다. 북한 무역의 90%를 차지하는 중국이 '뒷문'을 열어주면 북은 제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비핵화 협상에서도 배짱을 부릴 수 있다. 지난 5월 미·북 정상회담을 '애걸'했지만 이달 ARF에서는 남북, 미·북 회담을 모두 거부했다.

지금 제재가 흔들리면 비핵화는 물 건너간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중국에 '제재 유지' 촉구보다 종전 협조 요청이 더 급한 것 같다. 대중 외교 '투 톱'인 주중 대사는 김정은의 베이징 방문 기간 개인 일로 한국에 있었고 상하이 총영사는 부임 6개월 만에 짐을 쌌다. 뭘 믿고 이러나. 중국이 알아서 선의(善意)를 베푸는 외교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