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무인의 역사 1600~1894년

유진 Y 박 지음 | 유현채 옮김 | 푸른역사
292쪽
| 2만원

●조선의 잡지

진경환 지음 | 소소의책
| 396쪽 | 2만3000원

조선 왕조는 518년이나 지속됐지만 임진왜란 때 진작 망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망하지 않은 데는 정권 차원의 위기 관리 비책이 있었다. 유진 Y 박 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조선 후기 무인 등용문에서 체제 수호를 위한 완충장치로 변질된 무과(武科)를 꼽는다.

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공·사노비에게 무과 응시 자격을 줬다. 부족한 병력을 확충하기 위해서였지만 무능을 드러낸 지배계층에 쏟아질 피지배층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층민도 세상을 뒤집어엎기보다 왕이 주는 알량한 과거 합격증과 타협했다. 1402년부터 1591년까지 무과 급제자 누계는 7758명이었는데, 1608~1894년 사이 합격자는 12만1632명으로 폭증했다. 1620년 무과에선 합격자가 1만명 넘게 쏟아져나와 만과(萬科)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항복이 어느 모임에서 노비를 불러도 대답이 없자 "필시 이놈이 과거를 보러 간 것이로구나"라고 농담해 좌중을 웃겼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어린아이가 시험장에 나타나 난생처음 화살을 쐈고, 조정은 단 한 발만 과녁에 맞혀도 합격시켰다. 조선은 무과 시험이 거듭될수록 국방력은 허물어지는 아이러니에 빠졌다.

'18~19세기 서울 양반의 취향'이란 부제를 단 '조선의 잡지'는 실학자 유득공이 당시 풍속을 소개한 책 '경도잡지'를 새롭게 해석했다. 조선 사대부는 갓, 망건, 복건 등 다양한 쓰개를 즐겼는데, 퇴계 이황은 "복건은 중이 쓰는 두건과 같아서 선비나 학인에게 적절치 않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1000원권에 등장하는 퇴계는 복건 차림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람들의 사치를 꼬집는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양반들은 형편이 빠듯해도 거덜[巨達]이라는 견마잡이에게 말을 끌게 하는 사치를 즐겼다. 거덜들도 허세를 부려, 질 좋은 가죽으로 고삐를 만들어 광을 내느라 없는 살림에 헛돈을 썼다. '거덜 난다'는 말이 여기서 생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