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간 정상회담이 끝난지 나흘째에 접어들고 있지만, 백악관은 여전히 두 정상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댄 코츠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국제무대에서 졸지에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은 것으로 모자라, 언론 인터뷰 도중 푸틴 대통령의 방미 초청 소식을 접하는 망신을 당했다.

들끓는 여론에 잠시 숙이는 듯 하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가짜뉴스’에 화살을 돌려 공격을 퍼붓고 있다. 그야말로 난장판인 미·러 정상회담의 4가지 문제점을 정리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러 정상회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저자세를 보이며 반역적인 발언은 했다는 비난이 미국 내에서 들끓고 있는 가운데, 2018년 7월 17일 백악관 밖에서 한 여성이 ‘아기 트럼프’를 안고 있는 푸틴의 그림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① 회담 후 3일이나 지났지만…“트럼프, 관료들에게 브리핑도 안해”

CNN은 19일(현지 시각) 백악관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아직까지 회담 내용을 브리핑하기 위해 각 부처 관료들을 소집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존 볼턴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 등은 회담 직후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푸틴 대통령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에 관한 간략한 메모를 전달받았으나, 두 정상 간 구체적인 합의 내용에 대한 설명은 듣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회담 결과 브리핑이 늦어지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러 정상회담 이후 불거진 ‘반역자 논란’을 진화하는 데 급급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6일 미·러 정상회담 직후 ‘2016년 미 대선에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미 정보기관의 수사 결과를 부인하고 푸틴 대통령을 옹호해 미국을 발칵 뒤집어놨다.

백악관이 혼선을 빚는 동안 크렘린궁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두 정상이 회담에서 중요한 구두 합의를 도출해냈다’고 밝혀 앞으로의 합의 이행을 대비해 우위를 선점한 것이다. 리아노보스티통신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자국 대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회담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었으며 생산적인 합의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앞서 아나톨리 안토노브 미국 주재 러시아 대사는 두 정상이 시리아와 우크라이나 문제를 논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고 밝힌 바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8년 7월 16일 미·러 정상회담 직후 미국 ‘폭스뉴스 선데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스티븐 파이퍼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헬싱키에서 만난지 3일이 지났다. 러시아 측은 회담에서 여러 합의가 나왔다고 말하는데, 미국인들은 무엇이 합의됐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며 “이는 비정상적”이라고 지적했다.

② 백악관 “녹취 없었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두 정상이 일대 일 대화를 할 때 녹취가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없던 걸로 알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지난 16일 통역만 배석하고 약 2시간 30분가량 단독 회담을 가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내용이 언론에 새어나갈 것을 우려해 양국 관료들의 배석을 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 통역이 있는 공식 회담에서는 녹취를 바탕으로 대화 내용이 기록돼 외교 문서로 남는다. 그렇지 않고 대화 내용을 두 정상의 기억에만 의존할 경우, 나중에 한 쪽이 ‘나는 그렇게 말한 적 없다’고 발을 빼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대화 내용이 왜곡될 수도 있다.

러시아가 회담 내용을 녹취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코츠 DNI 국장은 이날 콜로라도주 애스펀에서 열린 애스펀안보포럼에서 ‘푸틴이 회담 내용을 녹음했을 위험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런 위험은 항상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내게 회담을 어떻게 진행할지 물어봤다면 아마 다른 방법을 제안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2018년 7월 16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핀란드를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이 헬싱키에서 사울리 니니스토 핀란드 대통령과 조찬 회동을 갖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오른쪽)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왼쪽), 로버트 프랭크 펜스 핀란드 주재 미국대사(왼쪽 두 번째)가 배석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과연 메모와 기억만으로 행정부 관료들에게 회담 내용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톰 컨트리맨 전 국무부 국제안보·비확산담당 차관보는 “러시아는 미국과 중요한 합의를 했다고 선전할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뭔가를 합의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가 이를 관료들에게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③ 美 정보 수장, 푸틴 워싱턴 초청 몰랐다

샌더스 대변인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볼턴 보좌관에게 올 가을 두 번째 정상회담을 위해 푸틴 대통령을 워싱턴으로 초청할 것을 지시했다”며 “이미 관련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같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름 아닌 코츠 국장이 소외됐다는 사실이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코츠 국장은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 국가안전보장국(NSA) 등 15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DNI의 수장이다.

코츠 국장은 이날 애스펀안보포럼에 참석해 대담을 하던 중 사회자가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초청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못 믿겠다는 듯 귀에 손을 가져다 대며 “다시 한번 말해 달라”고 했다. 이후 내용을 확인한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알았다. 그것 참 특별할 것”이라고 말해 청중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댄 코츠 국가정보국(DNI) 국장.

미 언론은 미·러 정상회담을 계기로 코츠 국장이 완전히 트럼프 대통령의 눈 밖에 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코츠 국장은 회담 직후 성명을 통해 “러시아가 2016년 대선에 개입했다는 우리의 판단은 분명하다”며 “러시아는 계속해서 미국의 민주주의에 파고들려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DNI가 아닌 푸틴 대통령을 두둔한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코츠 국장은 성명에서 “모든 것이 잘 진행될 거라는 가정 하에 일을 진행해선 안 된다”며 비핵화 문제를 둘러싼 미 행정부 내 낙관론도 경계했다. 그는 “폼페이오 장관이 1년보다는 더 긴 시간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북한이 1년 안에 비핵화할 수 있다’는 볼턴 보좌관의 발언에 회의적인 태도도 보였다. 이와 관련, 인터넷매체 악시오스는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은 코츠 국장을 파면하거나 그에게 자진 사임을 요구할 수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애초에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④ 언론 헐뜯기 나선 트럼프…“가짜뉴스가 미·러 관계 이간질”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를 통해 “러시아와의 정상회담은 국민의 진짜 적인 ‘가짜뉴스’를 제외하면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고 주장하며 언론이 회담의 성과를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푸틴 옹호’ 발언에 대한 비판이 좀처럼 수그러들 생각을 않자 맞불 작전에 나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가짜뉴스가 미쳐가고 있다. 그들은 어떤 출처나 근거도 없이 이야기를 지어낸다”며 “그들이 나와 내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 대해 쓴 많은 기사들은 완전히 허구”라고 했다. 그는 또 “가짜뉴스는 러시아와의 심한 대립, 심지어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대치 상황을 보길 너무나 간절히 원하고 있다”며 “그들은 내가 푸틴과 좋은 관계를 맺을 것이라는 사실을 끔찍히 싫어한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7월 18일 백악관에서 각료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에도 언론을 겨냥해 “어떤 이들은 내가 푸틴과 잘 지내는 것을 싫어한다”며 “그들은 우리가 전쟁을 하는 게 낫다고 보는 것 같다. ‘트럼프 발작 증후군(Trump Derangement Syndrome)’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언론이 ‘트럼프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비판하는 병’에 걸린 환자라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 편들기’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는 18일 백악관에서 열린 각료회의에서 ‘러시아가 여전히 미국을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했다. 러시아가 미국에 적대 행위를 하고 있다는 미 정보기관의 입장을 다시 한번 부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