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기자가 지난 10일 서울의 한 홈쇼핑 콜센터에서 일일 상담원 체험을 하고 있다. 콜센터 상담원들은 다양한 블랙컨슈머(악덕 소비자)에게 시달리며 감정 노동을 한다. 이들은 “고객의 권리가 소중한 만큼 근로자의 권리도 존중받고 싶다”고 했다.

1m 남짓 되는 칸막이 책상이 10개씩 20줄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책상에는 모니터와 수화기 한 대. 칸막이 오른쪽에는 '고객 대응 요령' 매뉴얼이 붙어 있다.

지난 10일 상담원 200여명이 일하는 서울의 한 TV 홈쇼핑 콜센터. 기자는 이날 일일 상담원으로 근무했다. "안녕하십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기저기서 '솔'음의 나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드폰을 쓰고 모니터를 켜면 업무가 시작된다. 상담 시스템에 로그인하는 순간 고객의 콜이 들어왔다. "A 홈쇼핑 안영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콜센터는 TV 홈쇼핑과 고객들이 벌이는 전쟁의 최전선이다. 주문을 비롯해 취소·교환·환불·AS·배송 관련 업무가 전화로 이뤄진다. 상담원에게 욕설이나 성희롱 발언을 한 적이 있을 경우 고객 이름에 '블랙컨슈머(악덕 소비자)'로 표기된다. 교육 담당자는 "3개월 지나면 업무가 몸에 붙고 1년쯤 되면 '숙련된 직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1년 이상 버티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만큼 감정 노동이 극심하다. 숱한 진상 고객 중 가장 골치 아픈 유형은 이런 성희롱이다.

"지금 모델이 입고 있는 속옷이 비치는데 클로즈업해서 자세히 볼 수 있나? XX 부분이 잘 안 보이는데?"(홈쇼핑 고객)

"실례지만 고객님, 그 부분은 힘들 것 같습니다."(콜센터 상담원)

매뉴얼은 "고객님과의 상담은 불가하오니 통화 종료하겠습니다"라며 '즉답'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함부로 콜을 끊을 수는 없다. 최대한 친절하고 정중한 음성으로 꼬투리 잡히지 않게 대처해야 했다. 성희롱은 그치질 않았다. 모니터의 고객 정보를 훑으며 사내 메신저로 파트장에게 보고했다. 전문상담센터로 이관하고 상황 종료. 폭풍우가 몰아닥친 것 같은데 지체할 틈이 없었다. 한 콜이라도 더 받기 위해 모니터에 뜨는 '고객'을 클릭했다.

다종다양한 진상 고객

"야, 내가 이 옷을 사흘 입고 빨았더니 보풀이 일어나고 목 주변이 늘어나데? 이런 쓰레기 같은 옷을 팔고 있냐? 당장 환불 안 해줘?"(고객)

"옷의 경우 외부 착용 후 반품은 어렵습니다."(상담원)

"이런 XX, 내가 맘카페 회원인데 이 홈쇼핑 불매운동할 거야!"(고객)

욕설은 예삿일이다. 상담원 이지현(여·27·가명)씨는 "전화 연결이 되면 뜬금없이 욕설을 퍼붓거나 폭언을 하는 경우도 있다"며 "처음에는 참고 들어야 하지만 상습적이면 상담 시스템에 블랙컨슈머로 등록하고 후속 조치가 따른다"고 했다. 전화를 걸어놓고 가만히 있는 경우도 있다. 콜센터 입장에서는 '업무방해'에 해당된다. 성희롱·성적 비하 발언은 '진상 중의 진상'으로 통한다. 상담원 강모(33)씨는 "홈쇼핑에서 비데를 판매했는데 남성 고객이 '아가씨, 비데 사용할 때 느낌이 어때?'라고 물은 적도 있다"고 했다.

상품 관련해 진상을 부리도 한다. 통상 손해 범위를 벗어나 무리한 보상을 요구하는 경우, 구매 의사 없이 상습적으로 취소 및 반품을 접수하는 경우, 상품 회수 시 상습적으로 사은품을 누락하는 경우 등이다. 최근엔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소셜미디어에 올려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겁박하는 경우도 늘었다. 한 상담원은 "요즘은 불만 사항에 대해 정식 절차를 밟기보다 청와대 국민 청원, 맘카페, 파워 블로그에 올려 불매운동을 벌이겠다며 협박하는 사람이 많다"며 "방통위·공정위·소보원에 고발하겠다거나 탐사 보도 매체 기자에게 제보하겠다는 경우는 그나마 합리적인 편"이라고 했다.

홈쇼핑 측은 '진상 고객 대응 요령'을 마련하고 있다. 신입 교육 기간에 받은 매뉴얼에 따르면 '당사 과실과 무관한 성희롱 고객'과 '당사 과실과 무관한 고객 개인감정으로 인한 욕설 고객' '당사 과실과 관련된 클레임으로 인한 욕설 고객'으로 분류돼 각각 응대 요령을 일러준다. 성희롱 고객은 즉시 통화 종료를 하도록 돼 있지만 개인감정으로 인한 욕설 고객은 일단 "실례지만 고객님,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건지요?"라고 공손하게 응대해야 한다. 당사 과실로 인한 욕설 고객을 응대하는 멘트는 더 길고 공손하다. "고객님 언짢으신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희 홈쇼핑을 믿고 구매해주셨는데 이런 불편을 드리게 되어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어떤 부분으로 마음이 상하셨는지 자세히 말씀해주시면 즉시 조치를 취하고, 담당자가 바로 고객님께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편두통은 직업병… '감정 수당'도 받는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서비스 산업의 감정 노동 연구' 조사 결과(2013년)에 따르면 조사한 콜센터 상담원 540명의 27%가 소화 장애를 앓고 있다. 우울증이 의심되는 비율도 25.2%에 달한다. 이외에도 성대 결절, 생리불순, 근골격계 질환 등 각종 질환에 시달린다. 상담원 박한나(여·29·가명)씨는 "지난해 2월부터 근무해 이제 일은 익숙해졌지만 원인 모를 편두통에 시달리게 됐다"고 말했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박씨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폭언을 들을 때마다 여전히 떨린다"며 "정신적으로 힘들어서인지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푸념했다.

홈쇼핑 측에서는 상담원들을 위한 복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발 마사지, 네일 아트, 컬러테라피 등 힐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가 하면 직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고충 상담 프로그램도 열고 있다. '감정 수당'이라는 이름의 보상금을 월 5만~10만원씩 지급하기도 하고 5년 이상 장기 근속자나 콜양을 많이 소화한 상위 5%에게 해외 연수를 보내주기도 한다. 하지만 진상 고객들이 줄지 않는 한 이런 조치들은 사후약방문에 불과하다. D 홈쇼핑 교육 담당자는 "고객들이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는 게 필요하다"며 "콜센터 상담원들을 일방적 약자로 생각하지 말고 근로자의 한 사람으로 바라봐줬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