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3세와 런던 탑에 유폐된 두 조카.

어린 두 조카를 죽이고 영국 왕이 된 리처드 3세(1452~1485)를 둘러싼 온갖 억측을 과학적으로 파헤치려는 작업이 영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리처드 3세는 형 에드워드 4세가 죽은 뒤 13세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을 맡았지만, 곧 그와 동생 리처드(10)를 런던 탑에 유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영국판(版) 수양대군'이라 불릴 만한 인물로, 셰익스피어의 동명(同名) 희곡에서도 악한으로 묘사된다. 비운(悲運)의 두 왕자는 이후 소식이 끊겼다.

1674년 탑 수리 과정에서 두 개의 유골이 돌계단 밑에서 발견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보관됐다. 1933년에 딱 한 번 이 유골함을 열어본 학자들은 '아마도' 두 왕자의 유골일 것으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이번에 학자들은 모계(母系)를 따라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검사와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 등 당시엔 없었던 첨단 기술을 동원해 이 유골들을 다시 들여다보기를 원한다고 영국 매체 인디펜던트가 12일 보도했다.

학자들은 1년 반 전 왕실 족보를 재검토해, 두 왕자의 외조모로부터 미토콘드리아를 물려받은 16대손 여성이 생존하는 것을 확인하고 DNA도 채취했다. 그의 미토콘드리아와 사원 유골의 것이 일치하는지, 이 유골의 주인공이 언제 죽은 것인지 좀 더 정밀하게 따지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500여 년 전 궁중 음모에 관심을 갖는 까닭은 두 왕자를 죽인 이가 리처드 3세가 아니라, 그와 싸워 이기고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3세 사후(死後)에도 적통인 두 왕자가 살아 있었다면, 헨리 7세의 왕권에도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

실제로 1495년에 에드워드 4세의 둘째 아들 '리처드'라고 주장하는 자가 헨리 7세에게 도전했다. 그런데 헨리 7세는 이 '평민'을 처형하지 않고 왕실 근위대의 감시 속에 가택 연금시켰다.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의 딸과 결혼했다. 따라서 이 '평민'이 사실은 '처남' 왕자라서 살려줬다는 추측이 일었다. 나중에 도주했다가 처형된 이 '평민'은 런던의 한 교회에 묻혔다.

만약 첨단 기술을 동원해 유골을 살펴본 결과, 두 왕자가 죽은 시기가 리처드 3세 사후인 것으로 나타난다면 리처드 3세는 최소한 조카를 죽였다는 누명은 벗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