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 봉암사는 풍수 문외한이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뒤로 우뚝 솟은 희양산과 사찰 앞을 흐르는 계곡 사이에 놓인 전각들은 이곳이 천혜의 수행처임을 단박에 일깨운다. 광복 후 성철·청담·향곡 스님이 한국 현대불교를 새롭게 설계할 때 왜 이곳을 찾아 '봉암사 결사'를 했는지 이해가 간다. 봉암사는 지금도 조계종의 유일한 종립(宗立) 특별수도원으로 1년에 단 하루 부처님오신날에만 일반에 개방하는 것 외에는 1년 내내 참선 수행이 이어지는 한국 불교의 자존심, 자부심이다. 올해 하안거에도 80명 선승이 정진 중이다.

봉암사 인근 문경세계명상마을 건립을 총지휘하는 의정 스님. 그는 “선승(禪僧)들이 뜻을 모아 이곳을 세계적 명상의 고장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스님 뒤로 보이는 바위 봉우리가 희양산이다.

이 봉암사에서 동쪽으로 도보 10여분 거리에 새로운 명상 수행의 명소가 탄생한다. 12만㎡(약 3만6000여평) 면적에 2021년까지 연면적 1만1000㎡(약 3360평) 규모로 크고 작은 명상실과 무문관, 1인용 수행처, 숙소 등이 들어설 '문경세계명상마을'(이하 명상마을)이다. 계단식 논밭이 있던 계곡은 앞으로 세계인들이 물 소리, 바람 소리 들으며 명상하는 장소로 탈바꿈한다. 선원수좌선문화복지회(대표이사 의정 스님)와 봉암사, 문경시가 뜻을 모은 이 명상마을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기획과 모금, 운영을 선승(禪僧)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공식을 하루 앞둔 11일, 현장에서 만난 의정 스님은 "선승들이 스스로 치료비 문제 등을 해결하자는 자구책으로 시작한 복지회가 한국 불교의 간화선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일로 커졌다"고 했다. 스님 말대로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전혀 '엉뚱한' 지점에서 시작됐다. 2012년 두 명의 노(老) 선승이 고독사(孤獨死)한 사건이 일어났다. 참선 수행에만 몰두하는 선승들은 '집도 절도 없는 신세'. 노후 대책, 건강보험 등도 충분치 않았다. 그 충격으로 복지회가 결성됐다. 선승들이 십시일반 회비를 내고, 얼마 전 입적한 무산 스님, 인천 용화사 송담 스님 등이 거액을 쾌척했다. 지금도 복지회는 연평균 100명의 병원 입원 치료비로 1억5000만원을 지급한다.

‘문경세계명상마을’ 조감도.

복지회가 정식으로 꾸려질 무렵 선승들 사이에서 "우리 병원비를 해결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선승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수행으로 세상을 돕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복지회 정관에 '선승 복지'와 '선 수행 전파' 두 가지를 주요 목표로 세웠다.

2016년 초 플럼빌리지, 테제공동체, 라투레트수도원 등 유럽과 미국, 일본의 대표적 명상센터를 직접 답사하고 국제선건축세미나를 열었다. 21세기 세계인들에게 맞는 수행 문화와 공간 건축을 공부하기 위한 현장학습이었다. 작년에는 세계 유명 건축가를 대상으로 명상마을 설계안을 지명공모했다. 당선된 미국의 토머스 한라한-현대종합설계팀이 내놓은 설계는 전통 한옥이 아니다. 단층 혹은 2층 규모로 주변 지형을 최대한 살리되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 와도 편안하게 지내며 수행할 수 있는 설계다. 명상마을은 연말까지 진입로와 웰컴센터를 짓고, 2021년까지 단계적으로 완성할 예정이다. 완공된 후엔 300명이 동시에 숙식하며 수행할 수 있다. 12일 기공식에 전국 각지에서 불자(佛子) 1000여명이 참석한 것은 이 명상마을에 대한 기대감을 보여준다. 전체 건축비는 국비 등을 포함해 290억원 정도. 선승들은 그중 3분의 1 정도는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각오다.

의정 스님은 "간소, 탈속(脫俗), 자연, 유현(幽玄·깊음), 고고(孤高) 등을 특징으로 하는 선(禪)은 위기를 겪고 있는 21세기 인류 정신문화의 대안이 될 수 있다"며 "문경세계명상마을을 세계적인 명상 수행의 중심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