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성 성분, 동물실험 반대… 똑똑한 소비자는 '비건' 찾는다
세계 비건 화장품 시장, 2025년 23조 전망

마스카라의 자극성을 실험하는 ‘드레이즈 테스트’를 위해 대기 중인 토끼들.

직장인 한지영(32) 씨는 최근 화장대를 비건 화장품으로 바꿨다. 인터넷에서 화장품 동물실험 영상을 본 후부터다. “토끼의 몸을 결박하고 눈썹에 마스카라를 수백 번 칠해 제품을 테스트하는 장면을 봤는데,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고통받는 토끼의 모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어요. 이후 화장품 살 땐 꼭 동물실험 여부를 따져요.”

비건(Vegan) 화장품이 뜨고 있다. 비건 화장품이란 동물성 성분을 사용하지 않고, 동물 실험을 통해 제품 개발을 하지 않는 화장품 뜻한다. 건강과 안전,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화장품 성분은 물론 제조 과정까지 꼼꼼히 따지는 똑똑한 소비자가 늘어난 것이 배경이다. 채식주의자와 반려동물 가구 증가도 비건 화장품의 등장을 촉구했다.

◇ 친환경적이고 윤리적인 ‘비건’ 화장품 부상

주부 이나영(35) 씨는 "화장품 살 때 브랜드보다 어떤 성분이 들어갔는지를 더 따진다. 브랜드 인지도가 낮더라도 화해(화장품 성분 공유 앱)에 공개된 성분이 안전하거나 후기가 좋으면 구매한다"라고 했다. 실제로 올리브영의 경우 올 1분기 성분을 차별화한 기초 화장품 군의 매출이 전 분기보다 200% 늘었다. 마스카라 실험을 당하는 토끼 사진이 온라인에 공개된 후엔 동물 실험을 하지 않은 입점 브랜드의 매출이 20~32% 증가했다.

비건 화장품이 뜨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이 린스타트업을 통해 론칭한 비건 화장품 가온도담은 온라인에서 시작해 서울 연남동에 단독 쇼룸을 오픈할 만큼 인지도를 넓히고 있다.

백화점 상황도 비슷하다. 이지현 신세계백화점 화장품 바이어는 “친환경 화장품을 찾는 고객이 늘면서 친환경 제품군을 늘렸다. 전체 화장품 중 30% 이상을 친환경 원료와 동물 복지를 추구하는 화장품을 구성했다”라고 밝혔다.

미국 시장조사 컨설팅 기관 그랜드 뷰 리서치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비건 화장품 시장이 연평균 6.3% 성장해 오는 2025년이면 208억 달러(약 23조 2800억원) 규모가 될 전망이다. 보고서는 밀레니얼 세대의 수요 증가를 근거로 댔다. 또 화장품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함에 따라 소비자들이 비윤리적인 동물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고, 이를 중단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고 짚었다.

화장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산업군에서 비건의 영향력은 커지고 있다. 패션업계에선 아르마니, 구찌, 자라, H&M 등이 모피와 모헤어, 앙고라 등 동물성 소재 사용을 중단한 바 있다.

◇ 세계 비건 화장품 시장, 2025년 23조 전망

국내에선 지난해부터 동물 실험 화장품의 판매가 금지됐다. 주요 화장품 업체들도 일찌감치 동물 실험을 중단했다. 아모레퍼시픽은 2008년부터 화장품 완제품과 원료에 대해 동물실험을 금지했으며, LG생활건강도 2012년부터 전 제품에 동물 실험을 중단하고 세포배양 독성 평가법, 면역세포 배양 평가법 등으로 대체했다.

‘비건’ 콘셉트를 내세운 색조 화장품 아워글래스.

아직까지 비건 화장품은 천연, 친환경, 유기농 화장품 등과 동의어로 쓰인다. 소비자도 동물 실험이나 동물성 원료 사용 여부보다, 천연 성분인지를 따지는 경우가 많다. 화장품 업계 한 관계자는 “친환경, 유기농을 살피던 소비자들이 꿀, 콜라겐 등 동물성 원료를 배제하거나 동물 실험 여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 수가 적지만 점점 더 늘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비건 화장품은 제조과정이 까다롭다. 천연 성분이 온·습도에 영향을 받아 관리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 아로마 등의 성분은 피부에 자극을 줄 수도 있어 안전성 검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장 수요가 늘면서 개발이 집중되고 있다. 영국 화장품 러쉬는 제품의 85%를 비건 화장품으로 채웠으며, 어반디케이, 투페이스드를 비롯 팝스타 리한나가 론칭한 펜티뷰티바이리한나도 비건 화장품을 표방한다. 국내에서는 아로마티카, 아이소이, 가온도담 등이 식물성 성분을 사용하는 비건 화장품으로 꼽힌다.

◇ 기초부터 색조까지… ‘비건’이 대세

비건 화장품이 주로 기초 화장품에 집중되는 가운데, 최근엔 립스틱, 블러셔, 매니큐어 등 색조 화장품에서도 비건 화장품이 나오고 있다. 과거 천연 색조 화장품은 발색력과 지속력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품질이 좋아지면서 편견이 깨졌다.

크레용으로 유명한 문구회사 크레욜라는 코코넛 오일과 크레용을 믹스해 비건 화장품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이제 화장품 시장에서 ‘비건’은 하나의 경쟁력이 됐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미국의 비건 색조 화장품 아워글래스의 국내 판권을 확보하고 매장을 확대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해외직구 등을 통해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였지만, 이 브랜드가 비건 화장품이란 걸 아는 소비자들은 별로 없었다. 고객들은 비건 화장품이란 사실에 더 호응을 보내고 있다”라고 했다.

얼마 전엔 크레용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문구회사 크레욜라가 영국 온라인 쇼핑몰 아소스와 비건 화장품을 론칭해 화제를 모았다. 화장품 스타트업 아르테티크 김수미 대표는 "화장품 시장에선 '비건'이 하나의 카테고리로 자리 잡았다. 해외 유통사에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는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것을 하나의 스펙으로 내세울 정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