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을 살아 보니, 인생에 필요한 건 그저 몸 누일 침대, 음식과 술 한 잔, 그리고 이야기 나눌 친구뿐이야. 내가 그동안 만난 진짜 바보들은 그걸 모르고 똑똑한 척하느라 인생을 망쳤지."

웬 잘난 척인가 싶지만, 이 엉뚱한 스웨덴 노인 '알란'의 말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지도 모른다. 100세 생일날 양로원 창을 넘어 도망친 그는 우연히 폭력조직의 돈 가방을 갖게 되면서 어영부영 만난 친구들과 모험에 휘말린다. 그 모험도 알란이 지나온 100년 삶에 비하면 새 발의 피. 폭탄 기술 때문에 20세에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스웨덴에서 거세당한 뒤, 스페인 내전에선 프랑코(1892~ 1975)의 목숨을 구했고, 미국 원자탄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트루먼(1884~1972)과 친구가 됐으며, 중국으로 가서 마오쩌둥(1893~1976)의 아내 장칭(1914~ 1991)을 구하고, 스탈린(1879~1953)에 의해 소련 강제 수용소에 갇혔다가 탈출해 북한에서 김일성과 11세 소년 김정일도 만났다. 스웨덴서 2009년 출간 뒤 35국에서 100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소설, 2014년 개봉해 세계 26국에서 한화 570억원의 흥행 수입을 올린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주인공 '알란' 이야기다.

장르 넘나드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①연극(2018) / '더 헬멧' '카포네 트릴로지' 등을 함께 만든 지이선 작가, 김태형 연출작. 사진은 1인 다역을 맡은 배우들이 100세 노인 '알란'이 가져온 여행 가방에 거액이 들어 있는 걸 알고 환호하는 장면. ②책(2009) / 인구 900만 스웨덴서 100만 부 팔리는 등 35개국 1000만 부 판매. 한국 2013년 발간돼 70여 만 부 판매. ③영화(2014) / 독일·미국 등 26개국 개봉. 박스오피스 매출 5113만달러(약 571억원). 할리우드 리메이크 제작 중.

이 '북유럽판 포레스트 검프' 같은 노인이 이번엔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속으로 들어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거고, 세상은 살아가게 돼 있어"라며 100세 노인이 건네는 마법 같은 위로의 주문에 장르를 넘어 독자와 관객이 호응하고 있다.

◇배우 5명이 만드는 60명 인물

연극은 대학로의 신예 콤비 지이선 작가와 김태형 연출의 합작품. 두 사람은 '더 헬멧' '카포네 트릴로지' 등 기존 연극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파격적 작품을 함께 만들어왔다. 세계 현대사 100년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260여 석 소극장 무대 위에 구현하는 건 단 5명의 배우. 쉴 새 없이 이름표를 바꿔 붙이며 등장인물 60여 명과 고양이·개·코끼리까지 변신을 거듭한다. 대략 1인 11역쯤 되는 셈. 배우들은 무대 위를 꽉 채운 세계 지도 모양의 거대한 장식장 속 시대와 나라를 표현하는 소품 154개를 활용해 객석의 상상력까지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관객을 향해 능청스레 말을 걸며, 때론 춤추고 노래도 부르며 친구에게 무용담을 들려주듯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소설·영화 이어 연극에도 통한 위로

연극은 영화보다 원작에 더 충실하고, 진행 속도는 멀미 날 만큼 빠르다. 하지만 연극 막바지, 알란이 평생 유일하게 애착을 가졌던 고양이 '몰로토프'를 표현할 때 극의 속도는 마치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온 듯 순식간에 느려진다. 몸짓과 조명만으로 고양이를 표현하는 배우들의 호흡이 따뜻하게 빛나는 명장면이다. '살아 있어요, 포기하지 말아요, 다시 성냥을 그어요' 하는 대사 역시 무대를 넘어 객석에까지 전해지는 울림이 있다. 100자루의 총보다 한 잔의 술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친구들과 고양이가 돈이나 이념보다 소중했던 알란의 이야기가 갖는 울림이다.

2013년 국내에서 열린책들이 펴낸 원작 소설은 70만 부 넘게 팔렸다. "노인 얘기가 내 가족 얘기가 된 시대, 모험이 없는 현대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과 통했다"는 평. 이 출판사 김영준 주간은 "1년 내내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해도 50만 부 넘기 어려운 출판 시장 상황을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다. 특히 수년간 주요 대학 도서관 대출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는 등 대학생이 많이 읽었다는 점도 의미있다"고 했다. 젊은 층에도 폭넓게 호응을 얻었다는 것.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각자의 자리에서 꽉 짜인 삶을 살아가는 지금 사람들에게 탈출과 모험이 주는 대리 만족과 즐거움도 흥행 요소였다"고 했다. 모두 연극에도 적용될 수 있는 해석들이다. 공연은 9월 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