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검찰 수사를 받던 유명 정치인이 주변에 했다는 말을 들었다. 24시간 뉴스 채널이 문을 연 때였다.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 곧 소환'이라는 자막이 얼마나 괴로웠던지 "자려고 눈을 감아도 (자막이) 눈에서 지나가더라"고 했다. 수사기관 처분을 기다리는 피의자 처지를 '나체(裸體)로 가시에 찔리는 것'에 비유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정치인이 딱 그랬던 모양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타고 뉴스가 빛의 속도로 빠르게 멀리 퍼져나가는 요즘은 더할 것이다. 압수수색 때 한 번, 소환조사 때 또 한 번, 그다음엔 구속영장과 기소까지 수사 단계를 거칠 때마다 피의 사실이 반복해 공표된다. 많은 경우 부풀려진다. 재판에 가기도 전에 유죄 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가 된다. 현대판 '조리돌림'이다.

▶'물컵 갑질'로 시작된 한진그룹 총수 일가 문제로 석 달째 떠들썩하다. 광고가 맘에 안 든다고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음료수를 뿌린 작은딸 얘기로 시작해, 공사장 관계자 빰을 때리는 부인 동영상이 공개됐다. 그걸 보며 혀를 차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큰딸이 이미 사고를 친 전력도 있었다. 수천억 재산 가진 사람들이 '사무장 약국'까지 내 잇속을 차렸다니 손가락질받아도 할 말 없을 것 같다.

▶그러자 검찰·경찰이 작은 딸, 부인, 회장을 모조리 감옥에 보내겠다고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뒤질세라 관세청, 출입국 당국, 국토부, 교육부, 공정위, 복지부까지 '손봐주겠다'며 달려들었다. 그간 압수수색이 11차례, 구속영장 4차례, 큰딸까지 포함해 총수 가족이 포토라인에 선 것만 9차례라고 한다. 부인 혼자서 출입국 당국과 경찰에 5번 불려갔다. 아들도 20년 전 대학 편입 문제로 조사받고 있다. 일가족을 일망타진하겠다는 것 같다.

▶'갑질 재벌'을 감옥에 가두면 대중(大衆)의 공분(公憤)을 풀어주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재벌 가족이 포토라인에 서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성실히 조사받겠다' 하는 걸 보며 통쾌했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그러나 법적 책임은 다른 문제다. 법에 정해진 혐의가 입증돼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법치가 아니다. 그제 회장 영장을 법원이 기각했고, 앞서 검·경이 신청한 영장들도 모두 기각됐다. 다른 사람에게 물컵을 던지고 갑질을 한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랬다고 어떻게든 엮어 구속하겠다는 것은 도덕과 법 영역을 혼동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