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 전쟁이 마침내 한국의 주력 산업인 메모리 반도체 시장까지 확전됐다.

중국 푸저우 지방법원은 3일 미국 최대 메모리(저장용)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에 대해 대만 반도체 기업인 UMC의 기술 특허를 베꼈다는 이유로 26개 제품의 판매 금지 예비 명령을 내렸다. 블룸버그통신은 "마이크론의 주력인 D램·낸드플래시와 이를 활용한 제품이 다수 포함됐다"고 보도했다. 이번 명령은 공식 판결 전에 마이크론의 중국 내 반도체 판매를 금지하는 일종의 가처분 명령이다. 이날 미국 뉴욕 증시에서 마이크론의 주가는 장중 8%까지 폭락했다가 5.5% 하락한 채로 마감됐다.

이번 판결은 잇따른 미국 정부의 중국 기업 제재에 대한 중국 정부의 반격으로 분석된다. 미국 정부는 지난 4월 중국 통신 장비 업체인 ZTE가 대북 제재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7년간 미국 기업과 거래 금지 제재를 내려 폐업 위기로 내몰았다. 또 지난 2일에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중국 최대의 통신업체 차이나모바일의 미국 시장 진출을 불허했다. 여기에 6일부터 미·중 양국은 서로의 수입품에 대해 최고 25%의 고관세를 부과하면서 본격적인 관세 폭탄 전쟁을 시작한다. 한 IT(정보기술) 기업 고위 관계자는 "양국이 분야를 가리지 않고 특정 기업까지 공격하며 치고받고 있다"면서 "반도체뿐 아니라 IT 전 분야로 무역 전쟁이 확산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中 법원, 마이크론에 판매 금지 예비 명령 내려

이번 소송전은 지난해 말 마이크론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지방법원에 UMC가 자사의 반도체 디자인을 베꼈다고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대해 대만 UMC는 지난 1월 푸저우 지방법원에 미국 마이크론이 자사의 핵심 공정 기술을 베꼈다며 맞소송을 제기했다.

푸저우 지방법원의 판결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경고라는 해석이 나온다. 대표적인 공화당 텃밭인 미국 아이다호주에 본사를 둔 미국 마이크론을 공격함으로써 경고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실제로 미국 아이다호주는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미국 전역에서 가장 높았다. 또 마이크론은 마지막 남은 미국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기도 하다. 반도체 업계 전문가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이 미국의 기술을 도둑질하고 있다'고 끊임없이 공격하는 데 대해 법원 판결로 반박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자국 반도체 육성을 위해 마이크론을 공격했다는 분석도 있다. UMC는 대만에 본사를 두고 있지만 중국 반도체 기업인 푸젠진화반도체·칭화유니그룹 등에 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전수해주고 있다. 푸젠진화반도체는 올 하반기부터 D램 양산에 돌입하고, 칭화유니그룹도 올해 말부터 낸드플래시 양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런 상황에서 UMC가 마이크론의 기술을 침해했다는 판결이 나오면 중국 메모리 반도체 양산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결국 중국 법원이 '마이크론이 UMC의 기술을 침해했다'고 선제공격을 한 셈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 정부가 바이두·알리바바 등 자국 인터넷 기업 육성을 위해 구글·페이스북을 반강제로 쫓아냈듯이 이번에는 자국 반도체 기업을 위해 마이크론을 타깃으로 삼은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SK하이닉스 당장은 반사 이익… 장기적으로는 타격 불가피

한국 양대(兩大)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번 판결이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우선 업계에서는 마이크론이 타격을 받으면 단기적으로 국내 업체들이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본다. 전 세계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공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마이크론을 대체할 방법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기업들도 피해를 당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이 보복 조치로 중국산(産) 반도체에 대한 관세를 높이거나 자국 기업들에 마이크론 제품을 우선 사용하도록 강제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중국 시안·우시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관세 폭탄을 맞을 수 있다. 또 중국 업체들이 정부와 자국 법원을 믿고 한국 기업을 상대로 특허 소송에 나설 수도 있다.

게다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마이크론과 함께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로부터 메모리 반도체 가격 담합 조사도 받고 있다. 조사 결과에 따라 막대한 과징금 징수, 판매 금지 같은 규제를 받을 수도 있다. 한 반도체 기업 고위 관계자는 "중국 입장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경쟁자일 뿐"이라며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미·중 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