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재판 거래' 의혹 수사와 관련해 검찰이 달라고 했던 양 전 대법원장 PC의 하드디스크를 디가우징했다고 밝혀 논란이 되고 있다.

디가우징은 강력한 자력(磁力)으로 하드디스크 속 파일의 복원이 불가능하게 완전히 파기하는 것이다. 디가우징은 2010년 정부의 민간인 불법 사찰 논란 때 외부에 널리 알려졌다. 불법 사찰을 한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들은 검찰의 압수 수색을 앞두고 이 수법으로 사무실 컴퓨터 속 자료를 삭제했다. 대법원은 "내부 규정에 따라 지금까지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쓰던 PC를 디가우징 해왔다"고 했다. 관례였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대법원이 법원행정처 관련 논란의 증거를 없애려고 양 전 대법원장 PC를 디가우징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대법원은 작년 10월 31일 양 전 대법원장의 PC를 디가우징했다. 양 전 대법원장 퇴임 한 달 뒤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해 '양승태 시절'의 행정처 권한 남용에 대한 재조사를 지시한 시점은 그해 11월 3일이다. 김 대법원장의 지시 전에 관례에 따라 디가우징한 것으로 재조사 증거를 인멸한 것은 아니라는 게 대법원 입장이다. 대법원은 2016~2017년 퇴임한 이상훈·이인복·박병대 전 대법관 등의 PC도 디가우징했다고 한다.

대법원은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의 PC를 디가우징해온 것과 관련, "대법원 판결 합의 과정이나 전원합의체 관련 자료, 주요 대법원 의사 결정 자료 등 공무상 비밀 자료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법원 주변에선 "증거인멸을 하려 했다면 '재판 거래' 의혹을 부를 수 있는 내용 등이 담긴 행정처 판사들의 PC를 디가우징했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일반 정부 부처에서 PC를 디가우징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행정안전부 정보 보안 지침 규정에 따르면 공무원은 직급에 상관없이 퇴임하거나 부서 이동으로 PC를 반납할 경우 하드디스크 속 내용을 지우는 포맷을 한다. 이 방식은 데이터 복원이 가능하다. 후임자가 컴퓨터를 물려받아 사용할 수도 있다. 검찰총장이 사용한 PC도 포맷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조계에선 "사법부 특유의 폐쇄적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