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사막으로 뒤덮인 아라비아 반도에도 예외가 있다. ‘풍요로운 아라비아(felix Arabia)’라 불려온 예멘이다. 지역에 따라 강수량도 풍부하고 식생과 풍광도 다채롭다. 자원 부국은 아니지만 석유 매장량(30억 배럴)은 중동에서 오만 다음이다. 해상 무역의 길목으로 문명 교류의 역사와 깊이도 만만찮아, 아랍의 정수(精髓)를 꼽으라면 예멘이 일 순위다.

그러나 현실은 참혹하다. 오랜 최빈국이면서도 전쟁의 참화로 고통받고 있다. 유엔에 의하면 2900만 국민 중 2200만명이 식량과 의약품 부족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4년째 접어든 전쟁은 1만30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고 28만 명 이상을 난민으로 만들었다.

이런 비극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의 대표 격인 이란이 예멘에서 대리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멘 인구의 57%가 수니파, 41%는 시아파다. 이 정도면 종파 갈등을 부를 만한 비율이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반군이 수니파 정부군에 반란을 일으키니 사우디가 수니파 9개국을 모아 연합 동맹군을 꾸려 반군을 공격, 국제 전쟁으로 비화됐다. 시아파 후티 반군 세력이 이란을 등에 업고 합법 정부를 붕괴시켰다는 비난도 적잖이 들린다.

하지만 꼭 외세만 탓할 일이 아니다. 외세의 개입을 부른 장본인은 예멘 집권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노회한 독재자 살레 전(前) 대통령은 권력욕에 빠져 자기 아들에게 정권을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권부 핵심 세력들이 세습을 반대하자 권력 내부의 균열이 일어났다. 분열은 가뜩이나 취약한 국정 기반을 흔들었다. 혼돈을 틈타 북부에서는 시아파 후티 세력이, 남부에서는 알카에다 아라비아 지부가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2011년 아랍의 봄은 모든 것을 뒤바꾸는 변곡점이었다. 예멘 국민은 독재자의 퇴진을 요구했고, 결국 살레는 부통령 하디에게 권력을 넘겨주며 하야했다. 국민은 타협에 기반을 둔 예멘의 안정적 미래를 기대했다. 모처럼 정치가 작동하는 듯했다. 환골탈태의 기회였다. 그러나 대권을 이어받은 하디 대통령 역시 무능했다. 그는 후티 세력 등 종파 및 부족 대표 등을 모아 연방을 구성하려 했지만 자기 권력에 집착하면서 연방은 좌초했다. 후티는 반군이 되었다.

시아파 후티 세력이 처음부터 반란을 기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예멘 연방 내에서 자신들의 인구에 비례하는 권력을 요구했었다. 인구 비율 41% 정도의 권력 지분만 보장되면 안정적 정치세력으로 예멘 중앙정부와 협력할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하디 정부가 6개 연방주 중 한 곳만 후티의 관할권을 인정하고 견제 및 압박에 나서자 총을 잡았다. 이란과 손잡게 된 계기다. 후티 반군은 레바논 헤즈볼라처럼 이란의 전위가 되어가고 있다.

같은 시아파라지만 소위 '다섯 이맘파(자이디파)'에 속하는 후티 반군 세력은 주류 시아파인 이란의 '열두 이맘파'와는 결이 다르다. 학자들은 예멘 시아파가 이슬람법 전승상 수니파에 더 가깝다고도 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서게 되자 자연스레 수니 대 시아 종파 진영론이 만들어졌다. 종교적 믿음의 차이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 권력 다툼을 위해 종파를 내세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종파의 맹주들이 개입, 국제 전쟁이 되어버렸다.

정치에는 필연적으로 논쟁과 대립이 있기 마련이다. 치열한 논쟁을 통해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예멘의 지도자들은 정쟁의 경계를 넘었다.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국민의 염원에도 상대 정파를 부정했다. 하도 오랫동안 분열하고 싸우다 보니 어느새 외세의 앞마당이 되어 전장(戰場)이 되어버렸다. 이제 죽음의 위협을 피해 백성은 난민이 되어 해외를 떠돌고 있다. 잠재력을 가진 아름다운 풍광과 빛나는 문명의 나라에서도 지옥도가 그려진다. 중동의 난맥상을 풀어가려면 정치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정치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