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고문

6·13 선거에서 참패한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전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마지막 막말’이 흥미롭다. 재임 중 청산했어야 할 대상으로 국회의원을 고관대작 지낸 후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 사생활이 추한 사람, 국비로 세계 일주가 꿈인 사람, 카멜레온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변색하는 사람 등을 비판하면서 구체적으로 ‘친박’을 거론했다.

친박 행세로 국회의원까지 하고도 중립 행세하는 사람, 탄핵 때 오락가락하고도 정치 생명을 연명한 사람, 초선으로 가장하지만 밤에는 친박에 붙어서 앞잡이 하는 사람 등을 적시했다. 당이 이렇게 된 배경에 '친박' 문제가 있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떠난 사람을 굳이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의 지적은 백번 옳다. 그의 이념적 행선은 적절했다. 문제는 그의 리더십이었다. 동지적 결속을 이끌어 내지 못한 리더십 말이다. 문제가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고 후회할 바에는 일찌감치 물러났어야 했다.

그가 떠난 당은 또다시 친박의 놀이터로 변했다. '너 나가라' '내가 왜 나가나' 하고 싸우며 노는 꼴이 추잡하다. 어려울 때는 입도 벙긋 못 하던 사람들이 당이 궤멸하고 나니까 이제 와서 너도나도 나서서 삿대질을 해대며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하는 것은 정말 꼴불견이다. 지난주 열린 의원총회에서도 초선, 기회주의자, 카멜레온들이 이제 와서 '애당자'로 나선 형국이다. 홍씨의 마지막 막말에 달린 댓글 마당 역시 친박의 화풀이장(場)이 되고 있다.

'친박' 문제가 뭐길래 보수 야당이 궤멸한 이 마당에도 보수층과 보수 야당을 두 쪽으로 가르고 그 존재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영어(囹圄)의 몸이 돼있는 것은 보수층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박 전 대통령 자질의 문제였든, 보수 집단과 언론의 문제였든 간에 지금 보수층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막아설 만큼, 아니 다 망한 집안의 부엌 그릇까지 깨부술 만큼 그렇게 시급하고 심대한 문제인가?

한국의 보수가 살아나려면 '박근혜 문제'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보수가 2년이 넘도록, 그리고 선거에서 지고도 '박근혜'로 여전히 치열하게 치받고 싸우는 한, 보수의 미래는 없다. 그것이 누구 잘못이든, 무엇이 발단이었든 '박근혜'는 이제 한국 정치에서 과거다. 거기에 매달린다고 박 전 대통령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친박이 다시 득세하는 것도 아니다. 지난 주말 열린 태극기 집회는 시간 착오적이다.

보수는 자원(資源)이 없다.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씨는 보수를 지탱하는 일곱 기둥으로 지식인, 언론, 기독교, 문화예술계, 대기업, 군부·검경 등 권력기관 그리고 정당을 꼽는다. 그런데 이 기둥들 가운데 오늘의 보수가 기댈 곳은 거의 없다. 이미 상당 부분 리버럴·좌파로 기울거나 넘어갔다. 대세가 보수를 떠난 것이다. 오늘의 좌파 세력은 일찌감치 보수의 기둥들을 잠식해 들어가 마침내 청와대와 지방 권력을 장악했고 마지막 국회만 남겨놓은 상태다. 그나마도 보수가 세월 좋았던 때 국민이 뽑아준 보수 정당이라는 기둥만이 재건의 터전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2020년에 국민의 선택에 좌우되는 국회만 기회가 남은 셈이다.

이념으로서 보수가 아무리 되살아난다 해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정치에 담아 낼 그릇 즉 정당이 지리멸렬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보수의 재기는 곧 보수 정당의 부활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자유한국당 등 보수 정당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통합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 일차적으로 일체의 친박 논쟁에서 해방돼야 한다. 그것이 오히려 박 전 대통령의 말년을 돕고 가능하다면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현실 정치는 지명도(知名度)의 게임이다. 이름 석 자와 경험으로 먹고사는 동네다. 그것을 깡그리 내려놓으면 신진(新進)의 세상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무명(無名)의 집단이 된다. 당을 이끌 사람들은 정계에서 이름 석 자가 있는 숙련된 ‘장교’여야 하되 조건이 있다. ‘별’은 달지 않겠다는 백의종군의 가이드가 돼야 한다. 이런 숙련 정치인이 모여 리더 그룹을 형성하고 그 밑에서 정파주의를 청산하고 내일의 보수를 떠안겠다는 사명을 가진 열혈 ‘청년’들이 뭉쳐야 한다. 그런 구도여야 보수 야당은 살아날 수 있다. ‘박근혜’를 넘어서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