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윤시내. 조선일보 DB

많은 노래는 미리 써둔 유서다. 뮤지션들은 세상에 다녀간 이유를 저마다의 절실함으로 기록하고 노래한다. 오늘 밤에도 어느 가난한 골방에서, 간곡한 삶의 흔적이 오선지에 새겨질 것이다. 그 흔적이 풍화를 이겨 훗날 누군가의 입에서 새 생명을 얻길 바라면서.

여기, 반대로 노래가 된 유서가 있다. 시한부 삶의 절망 앞에서 쓴, 한 남자의 글이 세상의 누선(淚腺)을 건드렸다. 그는 부산 지역 방송국 인기 DJ였던 배경모다. 죽음을 대면하고 아내를 향한 연가를 마지막 힘으로 써내려 갔다. 그 뜨거운 글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 최종혁이 멜로디를 입혔다. 그리고 가창자는 '마성의 디바' 윤시내가 됐다. 데뷔 앨범의 도발적 창법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그가, 이 극적인 엘레지의 주인공이 될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노래의 운명일 터다. '열애'는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에 관한 노래다.

비감한 전주 위로 저 유명한 내레이션이 흐르면 경건함과 슬픔이 함께 찾아온다. "처음엔 마음을 스치며 지나가는 타인처럼/ 흩어지는 바람인 줄 알았는데." 마음, 타인, 바람을 건드리는 동사는 스치다, 지나가다, 흩어지다이다. 쓸쓸하고 황량한 것들을 다 끌어왔다. 인연은 바람처럼 왔다가 흩어지는 것이다. 그 인연이 집착이 될 때 괴로움이 시작된다. 그 완고한 집착을 사랑이라 부른다. 시간이 집착을 다시 바람처럼 돌려세울 때까지, 우린 어쩔 수 없이 인연의 수인(囚人)이 돼야 한다.

내레이션이 끝나고 슬픔이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노래가 몸을 일으킨다. "그대 그림자에 싸여/ 이 한 세월/ 그대와 함께하나니." 더 멀리 갈 것도 없이, 사랑의 서사는 이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 나의 영혼이 당신의 그늘 안에 드는 것, 나의 생애가 기꺼이 당신의 배경으로 남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 열망은 거룩하다. 그 높고 순결한 시간을 견딘 뒤에 "꽃처럼 영롱한/ 별처럼 찬란한 진주"를 가슴 한편에 품을 것이다.

노래는 모든 것을 건듯 절정으로 솟구친다. "이 생명 다하도록/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리라." 인화성 가득한 윤시내의 목소리가 가사보다 더 맹렬히 타오른다. 이 절규 뒤에 맞이할 폐허가 문득 두려워질 정도로 슬픔의 절정은 황홀하다. 천국의 문이 있다면 저 슬픔 어딘가에 있으리라. 삶에 돋보기를 들이대면 비루해서 견딜 수 없다. 삶의 구체성을 모두 태워버리는 저 불꽃의 추상성만이 구원이다. 인간은 모두 한순간 불꽃으로 기억되는 사랑에 이르고자 한다. 그리하여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불멸성을 꿈꾼다.

이 노래는 한국 발라드의 한 진경이다. 실화의 직접성, 내레이션에서 샤우팅까지 이어지는 극적 구조, 그리고 윤시내의 대체 불가능한 가창까지 더해져 가요의 고전이 됐다. '열애'의 슬픔은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윤시내는 시대를 앞서간, 여전히 문제적인 보컬리스트다. 대중음악사 어떤 좌표에도 걸리지 않는 불가사의다. 1978년 데뷔 앨범 '공연히'가 던진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온몸을 비틀어 토해내던 솔 넘치는 그의 노래는 세상의 소리가 아닌 샤먼의 주문과도 같았다. 사랑을 위해 이토록 처연한 노래 하나를 유언으로 남길 수 있다면 복된 삶이다. 노래는 묻는다. 바람 같은 한 세월, 당신이 이 세상에 다녀간 이유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