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미술, 영화를 아우르는 박물적 지식과 재치 있는 말솜씨를 지녔던 이상(1910~1937)의 약사(略史)는 온갖 스캔들로 가득 차 있다. 1930년대 중반 어느 날, 기이한 사내 셋이 서울 거리를 걷고 있었다. 꼽추 화가 구본웅, 소설가 양백화, 백구두에 스틱을 휘두르는 이상이 그 일행이다. 어린애들이 '곡마단' 패거리가 왔다고 뒤를 따랐다.

이상의 이름 앞에는 '천재'라는 수식이 붙는다. 너무 일찍 식민지 조국에 와서 문학과 위악(僞惡)을 구명보트 삼아 표류하던 이상, 운명을 한껏 희롱하다 27세에 생을 끝낸 그는 진짜 박제가 된 천재일까? 단편 '날개' '지주회시' '봉별기' 등과 '오감도(烏瞰圖)' 연작시, 숱한 기행과 일화(逸話)를 유산으로 남겼다. 본명 김해경(金海卿). 근대 서울의 '댄디보이' 이상, '위트와 패러독스가 넘치는 화술'로 무장한 이상! 한일 병합하던 해에 태어나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首席)으로 나와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일했다.

폐결핵으로 퇴직한 뒤 카페 경영자로 나서 '제비다방' '쓰루' '69' 등을 열었다. 카페는 경영난을 겪으며 문을 닫았다. 그는 백수로 지내다 도쿄로 건너가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니시간다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1937년 4월 17일, 그가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을 때 화가 길진섭이 석고로 데스마스크를 떴다. 병원이 밝힌 사인은 폐결핵이 아니라 '결핵성 뇌매독'이었다.

수필가 김소운(金素雲)은 서울 종로의 한 다방 낙서장에서 그 길쭉한 얼굴, 헝클어진 머리털, 구레나룻에 묻힌 자화상과 그 옆에 '이상분골쇄신지도(李箱粉骨碎身地圖)'라고 쓴 것을 보았다. 이상이 휘갈긴 것이다. 김소운은 이상과 친해졌는데, 큰 키에 삐쩍 마른 몸통, 길쭉한 얼굴, 봉두난발과 구레나룻에 창백한 얼굴, 겨울에도 백구두를 신고 상반신을 흔들며 걷는 이상이 "표표하고 멋이 있었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