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논설고문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회담 목표는 북한에서 핵폭탄을 비롯한 대량 살상 무기와 그 운반 수단인 미사일을 제거하는 것이다. 북한은 그 대가로 미국의 북한 적대시 정책의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협상은 여전히 진통 중이다. 미국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 비핵화’를 언제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 발표문에 담으려 한다. 북한은 문재인-김정은 판문점 선언 수준으로 두루뭉수리 넘어가고 싶어 한다. 미국은 안전, 북한은 생존이 걸려 있으니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정치 담판(談判)에 대해선 이런 말이 있다. “'총을 이리 주게 그걸로 자네를 죽일 테니…'라고 말해선 안 된다. ‘총을 이리 내놓게’ 해야 한다. 총을 손에 넣으면 나중에 언제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회담 전 분위기가 살벌한 게 당연하다. 회담 의제 하나하나가 한국 안보에 직결된 문제들이다. 적게 잡아도 수백조원에 이르리라는 대북(對北) 지원 부담도 대부분 한국 어깨에 떨어진다. 트럼프는 한국 국익(國益)의 대리인이 아니다. 김정은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은 ‘타자(他者)들의 회담’에 운명을 맡겨두고 있는 처지다. 그래서 ‘한반도 봄이 왔다’는 빌딩 현수막이 서둘러 핀 꽃처럼 생뚱맞다. 싱가포르는 여전히 안갯속이지만 다음 날 치러질 지방선거 결과는 다들 짐작하고 있는 눈치다. 곳곳이 산사태·눈사태다. 이런 참에 작은 책을 하나 만났다. 제목이 ‘폭정(暴政)에 대하여(On Tyranny)’다. 미국은 오로지 독재자의 등장을 막아야겠다는 일념(一念)으로 헌법을 만든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이런 책이 어떻게 베스트셀러에 올랐을까 의아해하며 페이지를 넘기다 결국 밑줄을 긋게 됐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핵심 제도는 국민이 지켜야 한다. 법원은 정치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국민을 보호하는 기관이다. 문제는 법원이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다는 점이다. 정치권력 또는 다중(多衆)이 ‘당신들은 인민의 적(敵)이란 구호’를 앞세우고 공격하면 무력(無力)하기 짝이 없다. 법원이 무너진 황무지(荒蕪地) 위에서 정치권력은 더 위압적(威壓的)으로 군림한다. 민주주의를 누리려면 24시간 경계(警戒)가 필요하다. 최고의 경계 대상은 일당체제(一黨体制) 등장이다. 모든 권력은 선거에서 일방적 승리를 거둘수록 대담해진다. 헌법의 제한을 뛰어넘고 싶어 한다. 국민이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 선거가 될 수 있다’는 경계심을 풀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러시아인들은 푸틴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1990년 선거가 ‘사실상 마지막 선거’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공산당을 집권당으로 뽑은 1946년 체코인, 나치당을 제1당으로 밀어올린 1932년의 독일인도 똑같았다. 거리에 ‘증오의 상징’ ‘배척의 과녁’이 공공연하게 활보하면 허리띠를 단단히 매야 한다. 스탈린 치하 소련 정치 포스터는 부농(富農)을 살찐 돼지로 그렸다. 돼지를 도살하듯 학살해도 된다는 암시(暗示)였다. 시기심에 떠밀려 부농 학살에 박수를 보냈던 소농(小農)들은 얼마 안 가 땅을 빼앗기고 집단농장으로 끌려갔다. 증오의 상징·배척의 과녁은 이 직업에서 저 직업으로 수시로 이동한다. 당신 차례가 언제 닥칠지 당신은 모른다. 민주주의를 보존하려면 국민 각자가 직업윤리를 명심해야 한다. 전문 직업일수록 직업윤리가 절실하다. 어떤 독재자도 법률가의 내부 협조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법치국가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다. 히틀러는 윤리 의식이 마비된 의사들을 앞세워 살아 있는 인간을 해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는 상용(常用) 수법은 현재를 ‘예외적 상황’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예외 상황을 영구화(永久化)한다. 권력이 합법(合法) 기구로부터 군중에게 넘어가면 민주주의는 마지막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정치권력은 타인의 비밀과 사생활을 엿보고 싶어 하는 대중의 천박한 호기심과 결합한다. 타인의 비밀을 엿보는 자는 그것을 무기로 삼으려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 모든 국민이 권력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된다. 정치에서 속았다는 것은 정치인에게도 국민에게도 핑계가 될 수 없다. 싱가포르 회담이 어떤 결론을 내든 우리의 최종 목표는 북한 동포에게 인간적 삶을 되찾아 주는 것이다. ‘민족끼리’의 참뜻도 여기에 있다. ‘자유의 북진(北進)’을 생각해야 한다. ‘자유의 북진’은 우리 스스로가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를 보존·강화하는 데서 출발한다. 6월 12일과 13일을 우리는 그런 마음다짐으로 맞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