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주 미·북 정상회담에서는 합의문이 안 나온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sign)할 게 없을 거라고 예고했다. 김정은과 핵 담판은 한 차례 회담으로 결판나는 것이 아니라 프로세스를 거쳐야 하며 이번 회담은 그 프로세스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정은과 핵 합의 가능성이 없으면 회담장에 안 나갈 것이며, 회담장에 마주 앉았다가도 박차고 나오겠다고 했었다. 그랬던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친서를 들고 온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에게 "(비핵화 결단을) 서두를 필요 없으니 천천히 시간을 가지라"고 권했다. 이번 회담으로 '핵 없는 한반도'가 이뤄지려나 기대에 부풀었던 사람들은 닭 쫓다 지붕 쳐다보는 심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에서 종전선언이 나올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김영철과도 그 얘기를 나눴다"면서 "70년 동안 끌어온 전쟁을 끝낸다는 것은 역사적인 일 아니냐"고 했다. 미·북 회담의 당초 목표였던 북핵 폐기는 미뤄놓고 북핵 폐기가 되면 저절로 이뤄질 한반도 전쟁 종식을 끌어다가 회담 성과로 내세울 태세다. 북핵이라는 말이 앞에서 움직이지 않으니 종전선언이라는 마차가 앞서 달린다는 얘기다.
10년 전부터 노무현 정부 사람들은 유달리 종전선언에 매달려 왔다. 2007년 9월 한·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전쟁을 끝내고 평화조약에 서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측에서 사전 요청했던 발언이었다. 그런데 종전선언이라는 단어가 한국말로 통역되지 않자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다시 한번 얘기해달라"고 부탁했다. 부시 대통령은 "한국전쟁이 끝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김정일이 핵무기를 제거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곤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노 대통령 참모들은 10월 남북 정상회담에도 종전선언 문제를 끌고 갔다. 송민순 외교부장관은 "핵 문제가 해결 안 된 상태에서 종전선언을 먼저 하면 정전체제를 변경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반대했지만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 이재정 통일부장관, 김만복 국정원장 같은 핵심 참모들이 밀어붙였다.
따지고 보면 종전선언의 원조는 DJ였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김대중 대통령은 "이제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북한은 그 무렵부터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그것이 2차 북핵 위기로 이어졌다. 히틀러와 뮌헨회담을 마친 영국 체임벌린 총리도 "이 시대의 평화를 이뤄냈다"고 했으니 동서양 할 것 없이 햇볕론자들은 종전선언이라는 이벤트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불가침협정, 평화선언, 종전선언같이 서로 싸우지 말자고 약속한 나라끼리 1, 2년 안에 전쟁을 벌인 사례만 모아도 역사책 시리즈물이 나올 것이다. 종전선언이라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할 제안서의 한 줄 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올해 상반기 미국에서 발생한 총기 사고가 28건이나 된다. 지난 3월 25일 워싱턴 DC를 뒤덮은 80만명 인파가 "총기사고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선언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총기 소지를 금지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미국에서는 총기 사고가 끊이질 않을 것이다.
1991년 12월 18일 오후 7시 노태우 대통령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이 시각, 우리나라의 어디에도 단 하나의 핵무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1958년 처음 배치됐던 주한미군 핵무기가 33년 만에 모두 철수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당시는 북에도 핵이 없었으니 한반도 비핵화가 이뤄졌던 순간이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는 "한반도가 모처럼 평화에 다가섰다"고 했다.
김정은이 "이 시각,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 어디에도 단 하나의 핵무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순간이 온다면 한반도는 다시 한번 평화에 성큼 다가서게 될 것이다. 김정은의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 같은 절대 군주 체제에서 영도자의 말은 헌법 위에 있다. 김정은이 올 초부터 여러 차례 비핵화 의지를 밝혔다면서도 단 한 번도 육성 발언이 공개되지 않는 이유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김정은의 핵 부재 공개 선언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남·북·미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한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다. 김정은이 손에 쥔 핵을 포기할 때에야 진짜 평화가 이뤄진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필요한 선언은 종전선언이 아니라 김정은의 핵 부재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