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이 31일 대국민 담화를 내고 이른바 '재판 거래 의혹' 파문에 대해 사과했다. 김 대법원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판사 블랙리스트'가 있었다는 의혹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고 블랙리스트는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조사 발표 이후 엉뚱하게 '대법원이 상고법원 설립과 관련해 특정 사건의 판결을 청와대와 협상 카드로 활용하려 했다'는 '재판거래 의혹'이 불거졌다. 김 대법원장의 사과는 마치 '재판 거래'가 실제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25일 발표한 특조단 보고서에는 "재판 거래는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조사보고서에는 '재판에 영향을 실제 미칠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상고심의 절박한 상황을 해결하여야 한다는 미명하에 판결을 거래나 흥정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한 흔적이 발견되었음'이라는 표현이 나와 있을 뿐이다. 특조단의 보고서에 언급된 사건은 과거사 국가배상제한 사건, KTX 승무원 정리해고 사건,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 통합진보당 사건 등 20여 건이다. 특조단은 법원행정처가 이 사건들 재판에 직접 개입한 것이 아니라고 명백히 했다. 특조단 스스로 직권 남용 적용은 무리라고 결론을 내린 문제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현안말씀 관련자료'도 이미 선고가 난 여러 가지 판결 중에서 박근혜 정부에 도움 되는 판례를 모아 양 전 대법원장이 박 전 대통령을 만날 때 참고자료로 만든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실제 이 자료를 활용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일부 판사가 '재판 거래'를 기정사실화하고 관련자들에 대한 고발을 선동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 29일 KTX 해고 승무원들이 대법원 점거 시위를 벌이면서 "양 전 대법원장 구속"을 외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 편에선 내란선동 혐의로 수감 중인 이석기 전 통진당 의원 석방 요구도 나왔다.

대법원이 상고법원 신설을 위한 정부 설득 자료로 정부에 도움 되는 판결을 모은 홍보자료를 만든 것은 사법부의 올바른 처신이라고 할 수 없다. 당장 이런 불필요한 억측을 낳고 있다. 하지만 새 정권이 임명한 새 대법원장이 지시한 조사에서 재판 거래가 없었다고 하는데도 거래가 있었던 양 여론몰이를 하고 수사와 구속을 요구하는 것은 노골적인 거짓 선동이다.

김 대법원장은 담화에서 "최종 판단을 하는 대법원이 형사조치를 하는 것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각계의 의견을 종합해서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적 조치를 결정하겠다"고 형사 고발의 여지를 남겼다.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있지도 않은 '재판 거래'를 전제로 한 것 같은 언급이다.

안 그래도 최근 온갖 정치적 수사와 재판으로 사법의 신뢰는 크게 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판결이 나올 때마다 갈라진 양쪽에서 판사를 공격하는 일도 일상화되고 있다.

사법의 위기다. 그런데 사법부 수장이 실제 있지도 않은 재판 거래를 있었던 듯이 몰고가는 데 편승하면 앞으로 재판에 승복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어떻게 대법원장이 사실(事實)이 아닌 편에 설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새 법원 권력이 내리는 재판은 사실이 아니라 정치와 여론이 더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