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육군 참령 박승환(朴昇煥)이 서울 남대문 옆 시위대(侍衛隊) 1연대 1대대 사무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시위대는 황제 근위부대다. 참령은 현 계급으로 소령이다. 개인 신병 비관이 아니다. 유서를 남겼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참위(소위)로 임관한 지 10년 된 장교였다. 서른여덟 먹은 젊은 장교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총을 겨누게 만든 자가 있다. 군부대신이다. 참령 박승환은,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가 죽였다. 111년 전 서울 남대문으로 가본다.

헤이그 밀사 사건

1907년 4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당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 간도 용정에 있던 이상설, 서울에서 출발한 이준과 러시아공사 아들 이위종이다. 을사늑약이 부당하고 불법하다는 내용을 담은 독립호소문은 무시당했다. 6월 말 평화회의에서 외면당한 이준은 비분강개하다가 자진(自盡)해 죽었다. 훗날 이상설과 이위종은 간도와 연해주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7월 2일 밀사를 파견했다는 정보가 당시 통감 이토 히로부미 귀에 들어왔다. 이토는 노련했다. '(이 밀사 사건이) 칙명에 기초한 것이라면 한국에 대해 국면 일변의 행동을 취할 좋은 시기라고 믿음. 즉 세권(稅權), 병권 또는 재판권을 우리가 가질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함.'(1907년 7월 3일 오전 2시 이토 통감이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보, 통감부 문서 4권)

국보1호인 서울 남대문은 조선왕조의 흥망을 고스란히 지켜본 존재다. 1907년 8월 1일 남대문 문루에는 일본군 기관포가 설치됐다. 기관포는 최후의 전투를 벌이는 대한제국 시위대 병력을 향해 불을 뿜었다. 그날, 대한제국의 군사력이 사라지는 날이었다.

황제로부터 모든 권력을 박탈할 핑계가 생긴 것이다. 권력 박탈 작업은 직접 나서기도 했고, 이완용을 총리대신으로 한 내각을 통해 벌이기도 했다. 이날부터 8월 1일까지 근세사에 가장 비극적이고 극적인 시간이 시작됐다.

황제 퇴위 전야(前夜)

새벽에 전보를 보낸 이토는 곧바로 인천에 입항한 일본 해군 장성들과 함께 고종을 만났다. 황제에게 이토는 "일본에 대항하려면 공공연한 방법으로 하라"고 했다. '공공연한 방법'은 전쟁이니, 이는 협박 내지 조롱이다. 7일 이토가 본국에 보낸 또다른 전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일본에 대해 공공연히 적의를 발표하고 협약 위반임을 면치 못할 것이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선전포고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총리대신으로 하여금 말하게 했음.'(7월 7일 오전 1시 30분 사이온지(西園寺) 일본 총리에게 보낸 전보)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이어 1907년 고종 퇴위가 결정된 덕수궁 중명전.

그 전날인 6일에는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이 고종에게 요구했다. '스스로 일본 천황에게 가서 사과하든지 아니면 대한문 앞에서 (밀사 파견 행위를) 하세가와 사령관에게 사죄하라.' 일본 기록에 따르면 이날 어전회의는 2시간이 걸렸고 회의에서 총리대신은 선전포고 운운하며 황제를 협박했으며 농상공부대신은 궁궐 앞에서 사과를 하라고 겁박했다(이상 統監府政況報告竝雜報 등, 국사편찬위·'신편한국사' 재인용). 목표는 황제 퇴위였다. 이후 을사늑약이 체결됐던 그 장소, 중명전에서 많은 일이 벌어졌다. 쓰기에도 열 받고 읽기에도 열 받는 일들이 끝이 없었다.

남대문 시위대 설치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남대문 성곽 내에 군대가 들어섰다. 시위대(侍衛隊)다. 황제 궁궐인 경운궁을 경호하는 부대다. 포병 2개 대대와 보병 3개 대대, 기병대까지 갖춘 근대식 군대였다. 대한제국 소멸 무렵 총병력은 4000명이 넘었다. 운명의 1907년 여름, 시위대는 하루아침에 무장해제되고 군대는 강제해산됐다.

황제가 물러나던 날

군대 해산에 항의해 자결한 박승환.

7월 16일 친일 내각은 황제를 만나 시국 타개책으로 을사조약에 서명하고, 일본 천황에게 사과하고 퇴위, 물러가라고 요구했다. 고종은 거부했다. 7월 17일 서울 시내는 소란스러웠다. 종로, 기타 곳곳에 '임진란을 보라! 을미지사(乙未之事·왕비 민씨 시해사건)는 여하?' '일본인의 포학은 저지할 바를 몰라 도탄이 목전에 있다' 따위 벽보가 나붙었다.(조선폭도토벌지) 내각은 황제에게 다시 퇴위를 요구했다. 분노한 고종이 재차 거부했다.

7월 18일 오후 2시 이완용 관저에서 2시간 동안 내각회의가 열렸다. 의제는 황제 퇴위였다. 통감 이토로부터 지령을 받은 주구(走狗)들은 오후 8시 황제를 알현했다. 경운궁 바깥은 송병준이 불러모은 친일단체 일진회가 에워싸고 있었다.(신편 한국사) 황제는 시일을 달라고(帝答之以思數日而下批) 요구했다. 밤 10시 끝난 회의는 새벽 1시 재개됐다. '매천야록'(황현)과 정교가 쓴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대한제국 말년 역사라는 뜻이다)'에는 이 회의가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완용 등 7명이 입궐했다. 황제가 (양위를) 불허했다. 완용과 (송)병준이 불손한 언사를 무수히 했다. 이병무가 칼을 휘둘러 협박했다(李秉武拔劒威

之).'(대한계년사) '이완용이 칼을 뽑아들고 거친 소리로 말하기를 "지금이 어떤 세상인지 폐하는 모르시오" 하고 소리쳤다. 주위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러 만 갈래를 내고자 하였으나 임금은 이윽고 이완용을 흘겨보며 "그렇다면 선위하는 쪽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완용 등은 물러나갔다.'(매천야록) 새벽 5시에 끝난 이 어전회의에 대신들은 권총을 품에 숨기고 들어갔다. 법부대신 조중응은 외부로 나가는 전화선을 모두 절단했다.(朝鮮最近史附韓國倂合誌, 신편한국사 재인용) 그날 고종은 아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준다고 선언했다. 양위식은 바로 다음 날 7월 20일 열렸다. 날은 고종이 직접 정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권정례(權停例)로 하라.'(고종실록 1907년 7월 19일) 권정례는 임금이 임석(臨席)하지 않고 행하는 간이 의식이다. 황제 양위식은 고종도, 순종도 없이 치러졌다. '아침 수천 명이 궁성 앞에 군집하였고, 상가는 문을 닫고 조의(弔意)를 표하였다.'(통감부문서·1907년 7월 19일 오후 2시 45분 전보)

맹활약한 군부대신 이병무

친일파 군부대신 이병무.(대한민보 만평)

통치권 박탈에 필수 요소는 무력 박탈이다. 고종에게 칼을 들이민 군부대신 이병무는 이토 지휘하에 군대 무력화 작업을 벌였다. 나흘 뒤 발표된 정미7조약이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골자였다. 조약 비밀각서에는 이런 조항이 있었다. 황궁수비대를 제외한 모든 병력은 해산한다. 해산된 병졸은 간도로 이주시켜 개간에 종사시킨다. 국내 황무지 개간에도 종사시킨다. 군대 해산을 발표한 사람은 총리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그러니까 국방부장관 이병무다.(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일)

황제 고종을 겁박하던 7월 19일, 황실 근위부대인 시위대가 경운궁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이토가 보낸 비밀 전문에 따르면 '고종이 신료들을 적절한 기회에 살해하려고 병력을 궁중으로 부른 증거가 현저했다.' 그런데 이 거동을 30분 전에 감지하고 일본군이 미리 출동해 간신히 막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날 밤 '시위대 제1연대 3대대장 정위 임재덕에게 이병무가 궁궐 밖에 있는 헌병 70명을 입궐시키라 명했다. 임재덕이 불가하다고 버티자 헌병대장 이용한이 칼을 꺼내 군부대신에게 항명한다고 고함쳤다. 헌병들은 평복을 입고 육혈포를 들고 입궐했다.'(대한계년사) 이때 이병무는 일본인에게 부탁하기를, 임재덕이 끝까지 의심하면 그의 무기를 빼앗으라고 하였다.(매천야록)

바로 이병무다. 군부대신 이병무가 본인을 포함한 정미 7적을 살해 위협으로부터 구원하고 나라를 죽였다. 이병무는 1909년 '대한민보' 9월 2일 자 만평에 발가벗고 칼을 휘두르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박승환 참령과 남대문 전투

군대 해산은 8월 1일 전격 시행됐다. 이날 오전 7시 이병무는 대한제국군 장교들을 조선주차군 사령관저로 소집해 해산 조칙을 발표했다. 일본군은 용산 무기고를 점령하고 남대문에 기관포를 설치했다. 오전 10시 동대문에 있는 훈련원 연병장에서 대한제국 부대는 무기를 내려놓았다.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은 남대문 병영 사무실에서 권총 자살했다. 자살 소식이 전 부대에 전파됐다. 모두 분노했다.

그리하여 벌어진 전투가 남대문 전투였다. 임진왜란 이래 서울 시가지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였다. 1연대 1대대에 이어 2연대 1대대가 가세해 전투를 벌였다. 68명이 전사하고 부상은 100명이 넘었다. 516명이 포로가 됐다. 남대문에 설치된 기관포는 시위대 병영(현 상공회의소 뒤편)을 향해 끝없이 사격을 했다. 전투는 시위대 탄약이 바닥나며 4시간 만에 종료됐다. 프랑스 '르 프티 주르날' 1907년 8월 4일 자에는 이 장엄한 전투 풍경이 그림으로 보도됐다.

부상병들은 미국인 의사 올리버 에비슨이 운영하는 세브란스병원 의료진이 치료했다. 전투가 종료되고 며칠 뒤 이토가 병원을 방문하고, 이어 일본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부상병을 일본 병원으로 이송한다는 통보였다. 에비슨은 '부상병도, 한국 간호사들도 모두 두려움에 울었다'고 했다(올리버 에비슨, '근대 한국 42년'). 대한제국은 3년 뒤 사라졌다. 해산당한 군인들은 만주로 올라가 독립군으로 변신했다. 스스로 살기 위해 나라도 죽인 군부대신 이병무, 그가 모두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