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는 25일 오전 7시 20분쯤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됐다. 미·북 정상회담 무산을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서한이 공개된 지 약 9시간 만이다. 미국 현지 시각으로는 모두 24일 업무 시간 중에 벌어진 일이다. 북한이 특정 사안에 대해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대응한 것은 이례적이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북한의 당혹감이 역력하다"며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공부가 덜 됐던 것 같다"고 했다. 과거 대미 협상에서 습관적으로 구사해온 '벼랑 끝 전술'이 트럼프 대통령에겐 안 통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벼랑 끝 전술 안 통하자 당황한 北

이날 김계관의 담화에는 전날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담화, 지난 16일 김계관 자신의 1차 담화에 가득했던 막말과 협박성 언사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트럼프에 대해 '미합중국 대통령'이란 공식 직함을 쓰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시기 그 어느 대통령도 내리지 못한 용단을 내리고 수뇌상봉을 위해 노력한 데 대해 내심 높이 평가해 왔다"고 했다. 북한은 이 담화가 '위임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육성(肉聲)이란 것이다.

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북한으로선 상대방이 먼저 대화의 판을 깬 것은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라며 "김계관이 절제된 표현을 쓴 것은 트럼프의 요구에 순응한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분노와 위협'을 회담 취소 사유로 거론하며 '협박은 더 이상 미국에 통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발신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의 군사 옵션 사용 가능성에 긴장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24일 회담 무산을 선언한 공개서한에서 "당신(김정은)은 핵 능력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우리 것(미국의 핵)은 너무 방대하고 강력해서 그것이 사용되지 않기를 신께 기도한다"고 했다.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는 "작년 미국의 진지한 대북 군사 옵션 검토가 올해 북한이 파상적인 평화공세로 전환한 중요 원인"이라며 "북한으로선 생존 차원에서 대화 무드를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회담 재개 시도 이어지겠지만…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이 강원도에 새로 완공된 고암~답촌 철로를 시찰했다고 보도했다. 시찰 시점은 밝히지 않았지만 1호 행사(김정은 참석 행사)를 하루 뒤 보도하는 북한의 관행상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가 이뤄진 24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은 올 들어 공개 활동을 최소화한 상태다. 평양 밖으로 시찰을 나간 것은 올 들어 처음이고, 경제 분야 현지 지도도 3개월여 만이다.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이 오랜만에 지방 시찰을 나간 것을 볼 때 트럼프 행정부의 동향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다"고 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강원도에 새로 완공된 고암~답촌 철로를 현지 지도하고 있다. 북한 매체들은 이 소식을 25일 보도했다. 김정은 관련 행사를 하루 뒤 보도하는 북한 관행상 김정은의 시찰 시점은 지난 24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6·12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취소를 선언했다.

북한은 일정 기간 냉각기를 거친 뒤 대화의 모멘텀을 살리기 위한 시도들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회담 재개를 위해 미측에 실무 접촉을 제의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정영태 북한연구소장은 "정상회담에 대한 미련은 북한이 더 크다"며 "물밑 접촉을 통해 회담을 살리려 할 것"이라고 했다.

특히 김계관은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리비아식 비핵화'의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는 '트럼프 방식'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다. "'트럼프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쌍방의 우려를 다 같이 해소하고 우리의 요구 조건에도 부합되며 문제 해결의 실질적 작용을 하는 현명한 방안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고 했다. 외교 소식통은 "비핵화 방식을 두고 이전보다 미측의 요구에 귀를 더 기울이겠다는 메시지"라고 했다.

하지만 일단 궤도를 이탈한 '정상회담'이 조기에 다시 성사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남주홍 경기대 교수는 "실무 차원에서 비핵화와 체제 보장을 둘러싼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 당분간 쉽지 않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