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첩보기관인 중앙정보국(CIA) 71년 역사상 첫 여성 수장이 탄생했다. 미 연방 상원은 17일(현지 시각) 지나 해스펠(61) CIA 국장 내정자에 대한 인준안을 가결했다.

해스펠 국장은 2002년 태국에서 알카에다 소속 테러 용의자에 대한 물고문을 지휘한 전력 때문에 민주당은 물론 여당인 공화당 내부에서도 반대가 나와 인준이 불투명했었다. 해스펠 자신도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 중도 사퇴를 고려했다. 그러나 이날 투표한 상원 의원 99명 중 찬성 54표, 반대 45표로 의외로 여유 있게 통과됐다. 민주당에서 6명이 찬성으로 마음을 돌렸고, 공화당 내 반란표도 예상보다 적은 2명에 그쳤다.

지나 해스펠 미 중앙정보국 국장이 지난 9일 워싱턴에서 열린 상원 정보위 인준 청문회에 참석한 모습. 33년간 CIA 요원으로 현장을 뛴 그는 이날 2시간 반 내내 어떤 질문에도 자료를 들추거나 직원들에게 물어보지 않고 답변을 이어갔다.

물고문 전력을 압도한 건 해스펠의 전문성, 조직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지난 3월 지명 때까지만 해도 '물고문'과 '피투성이 지나(Bloody Gina)'란 별명 말고는 알려진 게 거의 없던 해스펠은 지난 9일 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서 처음 대중 앞에 섰다. 극도로 수수한 옷차림에 화장조차 거의 하지 않은 그는 "늘 음지에서 일하며 행적은 모두 국가 기밀로 분류된 삶이었지만, 그걸 빼곤 매우 평범한, 켄터키주 중산층 군인 가정 출신의 미국인"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1987년 첫 임지인 에티오피아를 시작으로 중동·유럽·아프리카의 험지만 골라 다니며 스파이 활동을 한 이야기, 모처럼 미국 본부에서 대테러 지휘 업무를 맡아 출근한 첫날이 바로 2001년 9월 11일(뉴욕 무역센터 테러일)이었다는 일화를 담담히 이어갔다. 그는 "그날 이후 나와 동료들은 결혼은 물론 임신 계획까지 미루고 국가를 위한 일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날 선 공세를 예고했던 민주당 의원들이 자세를 고쳐 앉았고, 숙연한 분위기가 확연히 감돌았다.

33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청문회에서 어떤 질문에도 망설임도, 정치적 고려도 없었다. '최대의 안보 위협'으로 러시아와 중국, 이란을 꼽았다. 특히 북한을 겨냥해 "미 본토를 핵으로 위협하는 '깡패 국가'를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게 최대 당면 과제"라고 했다. 그의 인준을 반대한 뉴욕타임스조차 "러시아의 미국 선거 개입이 논란이 되는 이때, 해스펠만큼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러시아를 잘 다루는 사람이 없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러시아의 영국 이중간첩 독살 모의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60여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하는 결정을 내린 데도 해스펠이 입김이 컸다고 한다.

해스펠은 최대 쟁점인 물고문에 대해선 "(부시 정부) 당시엔 법률 위반 사항이 아니었다"면서도 "국장이 된다면 현행법(2005년 발효된 고문 금지법)에 어긋나는 억류·고문은 절대 실시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이 도덕적으로 세계의 모범이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신의 신념에 반하는 일을 지시하면 어떻게 하겠는가'란 질문엔 "내 도덕적 좌표를 따르겠다"고 답했다. 그는 청문회 후 민주당 정보위 간사인 마크 워너 의원 측에 "당시 고문은 비도덕적인 일로,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더 명확한 '반성문'을 제출했다.

해스펠은 육사 진학을 꿈꾸었으나 70년대 당시 여자 입학생을 받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세에 결혼해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 9년 뒤 이혼하고 CIA에 들어왔다. 이후 독신으로 지냈으며 자녀도 없다. 그는 '최초의 여성 국장'이란 상징성에 대해선 "나는 그런 걸 떠벌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모르는 척하는 것도 직무 유기가 될 것이다. (나의 인준은) 소외돼온 CIA의 여성 요원들에게 큰 이정표이자 지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17일 "이번에 해스펠의 인준을 위해 CIA의 남녀 직원들이 이례적으로 나서서 '비난받던 우리 조직에 희망을 보여달라'고 언론에 호소했고, 리언 패네타 등 전직 수장들도 인맥을 총동원해 민주당 의원들을 설득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