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김성태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 태생의 유명 인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는 경신학교를 마치고 연희전문(연전) 상과에 입학했는데 경신학교에 다닐 적에 축구 선수로 이름을 날려 연전 상과에 스카우트되어 들어갔다고 스스로 자랑한 바 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찬송가의 선율을 즐겼고 풍금 소리에 매료돼 자연스럽게 음악에 대한 소양을 가꾸었다.

그는 연전 축구부의 중요 멤버로 낮에는 공을 차고 밤에는 바이올린을 연습하였다. 책임감이 강한 학생 김성태는 성적도 우수한 편이였다. 학생 시절에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교수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현제명이었다. 현제명은 연전에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김성태는 제1바이올린을 맡았고, 합창단에서는 테너로 활약하였다.

일년이면 한두 번 전국 순회 공연을 하였기 때문에 김성태는 은행보다도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여름에 열리는 음악 강습회에서 채동선의 강의를 듣고 나서 작곡가가 될 마음을 굳힌 것 같다.

그는 연희전문 졸업반이던 1934년 작곡한 동요 20곡을 모아 작곡집을 출판하였다. 동요를 작곡하게 된 것은 아마도 어린이날 제정에 공헌한 소파 방정환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동요집의 이름을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고 붙인 것은 그가 동대문 밖 이문동에 살 때 동무들과 이 노래를 즐겁게 불렀기 때문이라고 그는 회고하였다. 그는 이 동요집을 만드는 과정에서 동양적 선율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연전 3학년 때 보육 학교 출신인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음악과가 이화여전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 유학을 가야만 했지만, 김성태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다. 부인 윤선항이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들을 다 팔아 여비를 마련해 줘 그는 유학 길에 오를 수 있었다. "순전히 아내의 배려 때문이었어요 그때 아내가 남편을 이해하고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은행원으로 주저앉거나 축구 선수가 되었을지도 몰라요." 김성태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상당한 음악적 실력을 갖추고 있던 그는 동경고등음악학교에 입학했고 유명한 일본인 스승 밑에서 작곡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그때 받은 엄한 수련은 작곡가 김성태에게 완벽주의를 터득하게 하였다.

그 무렵에 쓴 작품은 피아노 독주를 위한 작품 2편과 가곡 '말' '산 너머 저쪽' 등이 있다. 이 중의 몇 편을 1937년 일본 오사카 공회당에서 개최된 '채선엽 독창회'에서 선보였다. 일본의 창가밖에 모르던 동포들에게 김성태는 새로운 예술가곡을 들려주었다. 브람스와 슈트라우스의 가곡들을 철저하게 공부한 그는 거기에다 한국적 분위기를 가미했다. 그래서 그를 '한국의 브람스'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시절 가장 유명했던 가곡은 김소월의 시 '산유화'였는데 거의 모든 성악가가 독창회 때마다 이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국민 가곡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연전 시절 스승이었던 현제명과 힘을 합하여 해방된 그해 12월 서울대 음대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경성음악학교를 설립하였다. 갑자기 교사를 마련할 수 없어서 예장동에 있는 한 유치원 교실에서 학교를 시작했는데 제1회 신입생 수가 93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다 큰 사람들이 유치원 원아들의 걸상에 앉아 강의를 듣는 것도 가관이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그때 교장이 현제명, 작곡 담당은 김성태, 피아노는 김원복, 성악은 이인범, 김천애, 바이올린은 김생려였다고 하니 교수진만은 쟁쟁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듬해 5월에는 제1회 정기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에 국립서울대학이 설립됨에 따라 그 음악학교는 서울대에 편입되어 예술대학 음악부로 개편되었다.

딸을 넷 낳고 끝머리에 아들 둘을 갖게 된 김성태. 아버지로서의 모습이 어떠했을까 궁금해서 그의 막내딸 기순을 내 집에 불러 장시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다른 자녀들은 내가 잘 모르지만 막내딸은 이화여대 음대 명예교수이기 때문에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반 사람들을 만나거나 학생들을 대하거나, 자세나 태도가 한결같이 단정하고 정중하였다. 자상한 남편이었고 엄하면서도 정다운 아버지였다고 딸은 회고하였다. 그는 끝까지 단아한 모습이었는데 노년에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음악회라도 모시고 가면 안쓰럽고 민망한 때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곡가 베토벤도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고생했다는데"라고 내가 그 딸을 위로하였다. 그럼에도 그 아버지는 음악회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끝까지 그 분위기를 즐겼다고 한다. 99세 생신을 축하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제자들이 베푼 기념 음악회에 김성태 자신이 참석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에 남길 만한 놀라운 일이었다. 김성태는 한평생 건강을 자랑했지만 하지 않았어야 할 수술을 했기 때문에 말년에 한 2년 병상에 누워서 고생하였다고 하면서 막내딸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김소월과 함께 '산에 피는 꽃'을 끝까지 사랑하고, 박목월과 더불어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의 가을을 느끼면서, 102년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라고 노래하며, 구름 헤치고 하늘나라에 올라간 요석 김성태의 다정한 미소가 한없이 그립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