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열린 제9회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의 최대 화두는 다음 달 싱가포르에서 개최될 미·북 정상회담과 북한 비핵화였다. 특히 북한이 이날 예정돼 있던 남북 고위급 회담을 돌연 취소하고 "일방적 핵 포기를 강요하면 미국과의 정상회담도 다시 고려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은 데 대해 각국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우려를 표했다.

◇"한·미, 북에 대한 냉정심 되찾아야"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미·북 회담 재고' 발언에 관해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났더니 상황이 달라졌다"며 "이것이 바로 현실이고 우리에게 익숙한 북한"이라고 했다. 그는 "김정은은 미국이 강조하는 핵 폐기 방식을 '리비아 모델'이 아닌 '카다피 모델'로 생각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김정은이 핵을 포기한 후 '아랍의 봄' 때 비참한 최후를 맞은 리비아 지도자 카다피처럼 될 것을 우려한다는 얘기다.

ALC 첫째 날인 16일‘남북정상회담 그 이후’세션에 참가한 스콧 스나이더 미 외교협회 선임연구원(왼쪽부터), 미치시타 나루시케 일본정책연구대학원대학 교수, 마크 매닌 미 의회조사국 선임연구원, 오미연 애틀랜틱카운슬 연구원.

조셉 윤 전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오늘 북한의 결정은 '더 이상 우리를 만만한 상대로 보지 말라'는 메시지"라고 했다.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도 "미·북 대화가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다 감속하는 단계"라며 "(미·북 대화 관련) 북한 내부에서 제기되는 우려에 대응하며 미국을 떠보려는 것 같다"고 했다. CIA 출신의 박정현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는 "김정은이 모든 것을 망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했고, 앞으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며 "잠시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북한 비핵화 문제점 진단' 세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이번 일을 한국과 미국이 냉정을 되찾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에번스 리비어 전 미 국무부 동아태 수석 부차관보는 "최근까지 환희에 차 있던 서울의 분위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는 "10년 전 영변 냉각탑 폭파 때도 '드디어 북한이 비핵화에 진정성을 보였다'고 반겼는데, 결국 어떻게 됐느냐"며 "핵 완성을 선언한 4월 20일의 김정은을 잊고 판문점에 등장한 4월 27일의 김정은만 믿을 경우, 북한이 핵보유국 지위를 유지하면서 한국·일본이 아닌 미국의 안보 위협만 없애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조너선 폴락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도 "아직 북한 주민들에게 '비핵화'를 공표하지 않은 김정은을 어떤 근거로 믿을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미·북 회담 기대되지만…"

다음 달 미·북 회담과 관련해서는 "기대가 되지만 구체적인 성과를 내긴 힘들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조셉 윤 전 특별대표는 "양국 정상이 처음 만나 마음을 떠보는 자리 정도로 봐야 한다"고 했다. 핵심 의제인 비핵화와 관련해 입장 차가 너무 크고 시간도 촉박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서로 유리한 협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충돌할 가능성도 크다"고 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한반도 문제를 담당했던 전직 분석관들도 이날‘CIA의 눈으로 본 미 대북정책 전망’세션에서 의견을 교환했다. 왼쪽부터 수미 테리 CSIS 선임연구원,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 박정현 브루킹스연구소 한국석좌.

빅터 차 석좌는 "이번 회담 성과에 관해선 회의적이지만,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지난 9일 방북할 때 백악관·CIA 주요 인사 등과 동행했다는 것은 긍정적 신호"라고 했다. 이어 "북한은 제재 완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움직임을 가장 신경 쓰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4·27 판문점 선언과 문 대통령에 관한 평가는 엇갈렸다. 클링너 연구원은 "문 대통령은 '굿 캅(착한 경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스콧 스나이더 미 외교협회 선임연구원은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미·북 가운데 북한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면 문 대통령이 미국에도 귀를 기울인다는 점은 다행"이라고 했다. 반면 마크 매닌 미 의회조사국 선임연구원은 "문 대통령이 최근 북한 경제 발전과 대북 협력 프로젝트를 너무 많이 언급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