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일(현지 시각) 미국의 이란 핵 협정 탈퇴와 함께 대(對)이란 제재 재개를 결정함에 따라 세계 경제에 적잖은 파장이 예고되고 있다. 특히 미국이 이번 조치로 유럽 동맹국들과 갈라서면서 미국의 수입산 철강·알루미늄 관세 부과로 촉발된 미국과 유럽 간 무역 갈등이 격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 대상으로 원유를 골라 지목해 이란발(發) 석유파동 우려도 제기된다.

이란 핵 협정은 2015년 7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미·영·프·러·중)과 독일 6개국이 이란과 맺은 것이다. 이란은 당시 핵 개발 포기를 조건으로 유럽의 경제 제재 해제를 보장받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정이 이란 핵 생산능력의 ‘완전한 폐기’가 아닌 ‘제한’을 전제로 했다는 이유로 2016년 대선 후보 시절부터 파기를 주장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5월 8일 백악관에서 미국의 이란 핵 협정 탈퇴를 선언하고 있다.

◇ 트럼프, 결국 이란 핵 협정 탈퇴 선언…“미국-유럽 간 무역전쟁에 기름 부은 격”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미국의 이란 핵 협정 탈퇴를 선언하고 이란에 “가장 높은 수준의 경제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돕는다면 누구든지 상관없이 제재를 가하겠다고도 협박했다.

미국은 이란 핵 협정 탈퇴 후 이른바 ‘2차 제재’를 통해 해외 기업들과 이란의 거래를 차단할 수 있다. 이란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기업들에 미국 시장 진입을 금지한다고 엄포를 놓는 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발언은 사실상 협정 체결 이후 이란에 대거 진출한 유럽 기업들을 겨냥한 것과 다름없다. 이란 핵 협정 참여국 중 유럽 3개국(영·프·독)은 트럼프 대통령의 탈퇴 선언 직후 협정에 잔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럽연합(EU)에 따르면 이란에 진출한 유럽 기업은 에어버스·피아트크라이슬러·지멘스·폴크스바겐 등 총 21개다. 독일 자동차 제조업체 다임러의 경우 이란에서 매년 4만대의 차량을 판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부터)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018일 4월 22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를 계기로 회동하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이들 3국이 협정에 남아 있어도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의 제재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주로 미국 은행을 통해 거래하거나 거래에 달러화를 사용하는 업체들의 피해가 예상된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 기업들에게는 결국 미국과 이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날이 올 것”이라며 “유럽으로서는 세계 시장과의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선 핵 협정을 재협상해야 한다고 이란을 설득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라고 했다.

ABC뉴스는 미국의 수입산 철강·알루미늄 관세 부과로 이미 미국과 ‘미니 무역 전쟁’을 겪고 있는 유럽에게 이번 이란 제재는 더 큰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유럽 지도자들이 이를 피하기 위해 미국에 이란 제재로부터 유럽 기업들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며,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미국에 맞서 미국산 상품에 관세를 부과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 美, 이란 제재 대상으로 원유 콕 집어…국제유가 향방 ‘안갯속’

세계 석유 시장에서는 공급 위축으로 인한 ‘제 3차 석유파동’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이란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중 3번째로 많은 석유를 생산하는 나라로, 현재 하루 평균 250만배럴을 수출하고 있다. 때문에 미국의 경제 제재가 시작되면 이란의 원유 수출이 줄어 유가가 오를 것이라는 게 시장의 중론이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2018년 5월 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핵 협정 탈퇴 선언 직후 이란 TV를 통해 연설하고 있다.

모하메드 바르킨도 OPEC(석유수출국기구) 사무총장은 이날 CNN머니와의 인터뷰에서 “국제 유가는 종종 지정학적 긴장과 그에 따른 시장의 변동성으로 인해 급등한다”며 “석유 산업의 매끄러운 흐름을 방해하는 어떤 요인도 세계 경제의 이익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미 정유회사 카나리의 댄 에버하트 최고경영자(CEO)는 “미국의 이란 핵 협정 탈퇴 후 유가는 상승세를 탈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반면 미국의 대이란 제재의 여파가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관측도 있다. 이란 핵 협정 참여국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과 독일이 미국의 ‘나 홀로 제재’에 동참하지 않을 가능성이 큰 데다가, 이란산 원유의 주수입국인 인도·터키 등도 미국의 제재에 협조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협상을 시도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퍼포먼스 트러스트 캐피탈 파트너스의 브라이언 배틀 투자담당자는 “트럼프 대통령은 문을 닫은 게 아니라 새로운 협상을 원한 것”이라며 “재협상을 위한 문은 열릴 것이고, 트럼프 대통령은 전보다 덜 강경하게 나올 수 있다”고 했다.

한편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탈퇴 선언 이후 유가는 급락했다.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미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선물 가격은 전일 대비 배럴당 1.67달러 하락한 69.06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거래되는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배럴당 0.47달러 떨어진 75.71달러를 기록했다.

미 경제전문매체 CNBC는 시장이 대이란 제재보다 그 유예기간에 주목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곧장 제재 재개에 돌입할 것이라는 우려가 다소 완화됐다는 것이다. 스티븐 므누신 미 재무장관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핵 협정 탈퇴 선언 직후 성명을 통해 “미 재무부는 제재 품목에 따라 90일 또는 180일의 유예 기간을 줄 것”이라며 “이후 제재를 완전히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