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갑옷, 구정동 3호 묘, 국립경주박물관.

1982년 2월, 최종규 경주박물관 학예사는 안재호 연구원과 함께 유적 지표 조사에 나섰다. 대상지는 1951년 도로 공사 중 청동기와 철기가 출토된 적이 있는 불국사역 주변이었다. 현장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최 학예사의 시야에 야트막한 야산 하나가 들어왔다.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곤 지체 없이 야산을 오르던 중, 정상에 조금 못 미쳐 나무뿌리 사이로 노출된 토기 1점을 발견했다.

경주박물관은 조사단을 꾸려 3월 1일 긴급 발굴을 시작했다. 토기 발견 지점에 있는 1호 묘에서는 토기 4점과 철기 8점이 더 출토됐다. 이어 구릉 정상부에서 무덤 2기가 확인됐다. 모두 좁고 길쭉한 형태였는데 상대적으로 큰 3호 묘는 길이가 8m에 달했다. 산정(山頂)에 이토록 큰 무덤이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기대는 더욱 커져갔다.

무덤 내부 흙을 조금씩 파내자 초유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2호 묘에서는 길이 80cm 안팎 쇠창 26점이 바닥에 쫙 깔려 있었고, 3호 묘에서는 쇠창 25점 이외에 갑옷 두 세트가 출토됐다. 철판을 일일이 망치로 두드려 만든 부품을 쇠못으로 조립한 것으로, 어깨와 목을 보호하는 견갑과 경갑까지 갖춘 것이었다.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갑옷이, 그것도 2점이나 온전한 상태로 발굴된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최 학예사는 이 무덤이 조양동 목곽묘에 후속하는 4세기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무덤의 구조나 출토된 유물에서 신라적 색채가 엿보임을 지적하는 한편, 특이한 무덤 입지를 주목했다. 이 무덤에 묻힌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높은 지위를 드러내고자 다른 사람들처럼 평지에 무덤을 쓰지 않고 산정을 묘지로 선택한 것으로 해석했다.

한반도의 4세기는 격변 시대였다. 크고 작은 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통합 전쟁에서 신라는 살아남아 끝내 패권을 차지한다. 구정동 산정에 묻힌 신라인들도 그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닐까? 그 무렵 오랜 시행착오 끝에 완성한 철갑옷 제작 기술은 신라인들에겐 승리로 이끄는 '믿을 만한 구석'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