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

얀 루프-오헤른 지음 | 최재인 옮김
삼천리 | 308쪽 | 1만7000원


'그 일'을 겪은 후 50년간 여자는 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생일에도 두 딸에게 "꽃만은 사오지 마라!"고 했다. 자주 허공을 노려보았다. 마음 속에서 수치스러운 비밀이 가득 차올랐다.

1944년 2월 26일 자바에서 나고 자란 21세의 네덜란드 여대생 얀 오헤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간다. 수녀가 되고팠던 오헤른은 꽃 이름을 딴 일본 이름으로 불리며 흰 난초로 장식된 방에서 석 달가량 밤낮없이 강간당한다. 꽃은 사무치게 아픈 상처로 남았다.

유럽인 최초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라는 사실을 밝힌 오헤른의 수기(手記)다. 50년간 침묵했던 그녀는 1992년 초 TV에서 한국 '위안부' 할머니들의 폭로를 보고 용기 내어 동참한다. 그녀는 외친다. "우리는 '위안부'였던 적이 없다. '위안'이란 편안하고 다정하고 친근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아니다! 우리는 '전쟁 강간 피해자'들이다."(236쪽)

1992년 12월 도쿄 국제청문회, 오헤른은 "나는 일본인들이 나에게 한 짓을 용서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잊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 후 50년 만에 꽃을 손에 들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호주 야생화로 만든 '용서의 화환'을 도쿄의 2차대전 전몰자 묘원에 놓았다. 수난당한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가해자들을 용서하는 오헤른의 심경이 읽힐 때, 독자는 눈시울을 붉히게 될 것이다.

"도쿄에서 증언을 한 뒤, 나는 내가 겪은 모든 고난에 의미가 있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선이 악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음을 나는 늘 알고 있었다."(255쪽) 원제 Fifty Years of Sil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