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경찰서 소속 김민아(24)순경은 채용 10개월차 새내기다. 지난 19일은 비번(非番)으로 늦잠을 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날 오전 9시 50분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금융감독원과 검찰청이 합동내사 중이예요. 김민아씨 통장이 범죄에 이용됐습니다”라는 굵직한 남성 목소리가 들렸다. 보이스피싱이었다.

'얻어 걸렸다'는 생각에 김 순경 마음이 급해졌다. 덩달아 목소리도 떨렸다.
"정말요? 저는 그런 일이 없는데요."
범인(犯人)은 이것을 '당황'한 것으로 오해했다.

"이게 작은 사건 같아요? 민아씨?"(범인)
"아니 아직 세수도 안해서…"(김 순경)
"꽃단장하시라는 게 아니잖아요."(범인)
"(순간 웃음)그런데 모니터링 어떻게 하세요?"(김 순경)
"아, 글쎄 저희가 CCTV로 모니터링 한다니까…"(범인)

범인은 전화를 끊거나 다른 이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 전화녹음은 증거로 사용될 것이니 전화를 끊거나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을 전하면 절대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김 순경은 전화통화 도중에 카카오톡으로 용산서 용중지구대 동료에게 "보이스피싱이 걸렸는데 지원 바랍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접견장소를 말해달라. 출동하겠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김 순경은 가족들에게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해달라”고 부탁했다. 현금뭉치처럼 보이기 위해 종이가방에 소설책 두 권을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평소 즐겨읽던 것으로 골랐다.

접선장소는 서울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 여기에서 보이스피싱 공범(共犯·이하 ‘전달책’)을 만나기로 했다. 범인은 이 상황을 모르고 “여자 감독관님 배정해 드렸다. 저희가 (김 순경)편의 봐드리는 거니까 성실하게 업무보셔야 한다”고 했다. 김 순경은 삼각지역으로 가는 도중에 현금인출기(ATM)에 들러 돈 뽑는 시늉까지 했다.

이 무렵 용중지구대 소속 경찰관 5명은 삼각지역 주변에 잠복했다. 지구대 팀장은 중국집 배달원으로 변장한 채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나머지는 평범한 옷차림의 행인으로 가장하고 지하철역 출구를 지켰다. 오후 12시 50분쯤, 김 순경이 삼각지역 3번 출구에 도착했다. 이윽고 정장을 빼입은 ‘전달책’ 김모(54)씨가 나타났다. 김 순경보다 체구가 작은 단발머리 중년여성이었다.

신입보이스피싱 ‘전달책’ 김모(54·왼쪽부터 두번째)씨가 경찰에 붙잡혔다. 김민아(24) 순경 등 용산서 용중지구대 소속 경찰관들은 보이스피싱범을 유인, 삼각지역에서 김씨를 검거했다.

김 순경이 ‘1300만원’이라면서 소설책이 든 종이가방을 건넸다. 전달책 김씨가 이것을 받아드는 순간 용중지구대 소속 경찰관들이 달려 들어 수갑을 채웠다. 별다른 저항은 하지 않았다. 김씨가 체념한 듯 말했다. “오늘따라 어쩐지 나오기 싫더라니…(종이봉투가)어째 돈 같지 않고 무거워서 이상하더라.”

용산서에 따르면 검거된 보이스피싱 ‘전달책’ 김씨는 5일간(4월 15~20일) 모두 6명의 피해자로부터 5270만원을 뜯어낸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김씨에게 ‘지시’를 내린 보이스피싱 조직 윗선에 대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김 순경은 “경찰서에 있으면 특히 20대 여성들이 한 달에 한번 꼴로 보이스피싱에 당하는 것을 본다”며 “모르는 번호로 ‘돈을 전달하라’는 전화가 오면 100% 보이스피싱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