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겨울, 베를린 거리에서 대대적 유대인 검거 작전이 펼쳐졌다. 비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혼혈 유대인 남자들이 검거 대상이었다. 이들은 게슈타포 본부 부근 유치장에 갇혔다. 사라진 아들과 남편을 구하려 행동에 나선 것은 아내와 어머니 등 여성들이었다. 6000명 넘게 불어난 여성 시위대가 유치장에 몰려가 갇힌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시위라곤 해본 적 없는 여성들 외침에 나치도 당황했다. 그들로선 처음 겪는 여성들 시위였다. 이들의 외침에 붙잡혀 간 사람들도 용기를 얻어 유치장에서 저항을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음 직전에 벗어났다. 그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가 '로젠슈트라세'다. 유치장 있던 거리 이름을 땄다.

▶사회 약자들의 자발적 결속과 조용한 분노가 때론 야만과 폭력을 잠재우는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제 경북 성주에서 열린 사드 반대 시위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위대 맨 앞줄에는 노인과 여성들이 배치돼 있었다. 150명 시위대는 비닐 끈, 밧줄로 몸을 묶는 '연대 표시'로도 모자랐는지 알루미늄봉을 용접해 그물망 같은 것을 만들었다. 노인과 여성들은 그 안에 들어가 목만 내민 채 앉아 있었다. 흡사 인신을 구속하는 형틀 같아 보이는 녹색 그물망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시위대 중 주민은 많아야 20~30명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외부 시위꾼들이다. 이들은 집회가 있을 때 버스 타고 몰려들었다 연기처럼 빠져나간다. 경찰에 따르면 재작년 성주에서 황교안 총리가 차 안에 갇혔을 때 '불 질러라, 뜨거우면 나오겠지' 선동한 것도 이들이라고 한다. 땡볕 내리쬐던 작년 7월에도, 찬 바람 불던 작년 11월에도 시위대의 앞줄에서 할머니들이 팻말을 들고 연좌농성을 했다.

▶전쟁 때 힘없는 사람을 앞세워 총알받이로 쓰는 걸 '인간 방패'라고 한다. 몇 해 전 급진 이슬람 단체 IS가 수백 명을 인간 방패로 세워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1995년 보스니아 내전 때도 포로와 난민을 총알막이로 썼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교활하고 비겁한 폭력이다. 성주의 사드 반대 시위에서 강자(强者)는 시위대, 약자는 경찰이다. 그저께 시위 때도 경찰은 '야만' '폭력'과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시위대는 여성과 노인에게 포승줄 같은 그물망을 씌워 맨 앞에 내세웠다. 비열하다. 이런 사람들이 외치는 반전·평화가 무슨 울림이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