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관점에서 서술하되 진보 혹은 근본주의 입장을 가진 분도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교회의 자화상을 객관적으로 그리려 했습니다. 급성장하던 개신교가 불과 한 세대 만에 외면당하게 된 이유도 찾아보고 싶었죠."

개신교 교회사학자 박용규(62) 총신대 교수가 '한국기독교회사'(한국기독교사연구소) 전 3권을 완간했다. 2004년 1·2권을 펴낸 지 14년 만이다. 1권은 1784년 이승훈이 천주교 세례를 받은 때부터 1910년까지, 2권은 1910년부터 1960년까지 천주교와 개신교 전체의 역사를 다뤘다. 1·2권 합해 2400쪽, 3권은 13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이번에 발간된 3권은 '1960~2010'을 다루면서 작년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까지 포함하고 있다.

27년에 걸쳐‘한국기독교회사’전 3권을 완간한 박용규 교수는“불과 한 세대 만에 영광과 정체를 경험한 한국 교회는 하나님과 역사 앞에 다시 길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3권 집필에 14년이나 걸린 까닭을 "내용 숙성이 필요해서"라고 했다. 현재진행형인 역사인 데다 생존 인물도 많기 때문이다. 목차(目次) 작업에만 5년이 걸렸고, 민감한 내용도 있어 변호사 법률 자문까지 했다.

책을 펼치면 지난 반세기 한국 개신교 영광과 좌절의 현대사가 슬라이드쇼처럼 펼쳐진다. 지난 50년간 한국 개신교 교단은 세포 분열하듯 갈라졌지만 한편으론 세계적 초대형 교회들이 등장했다. 대형 교회들은 새 건물을 짓고 교육관, 기도원, 묘지를 만드는 것이 패턴처럼 됐다. 이 시기 한국 개신교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선교사 파견 국가에 올랐고, 외국에 이민 간 교민들에 의해 한인교회가 성장했다. 영광의 그늘도 드리워졌다. 농촌 교회의 쇠락 등 교회의 양극화와 세속화가 심화됐고, 개신교의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전도 방식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했다. 이단 논쟁도 격화됐다.

박 교수는 이 모든 과정을 꼼꼼히 정리했다.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애썼다"는 말처럼 한국 개신교의 잘한 점에 대해선 칭송을 아끼지 않지만, 잘못된 부분은 가차 없이 비판한다. 이 책이 한국 교회의 자기 비판서로 읽히는 이유다.

우선 한국 개신교가 급성장한 배경으로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종교적 희망'을 제시한 점과 세계적 대중 전도운동이 맞물린 것을 꼽았다. 박 교수는 1980년대 이후 한국 목회자들이 모델로 삼은 두 가지 흐름을 꼽았다. 하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성령운동, 다른 하나는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이다. 박 교수는 "성령운동이 뜨겁고 감성적이라면, 제자훈련은 냉철하고 이성적"이라며 "두 흐름 모두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성령운동이 머리는 작고 가슴이 큰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었다면 제자운동은 머리는 크고 가슴이 작은 그리스도인을 양성했다는 것. 두 흐름 모두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노력은 부족했고, 교회 성장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박 교수는 "역으로 그 한계를 극복하고 성령운동과 제자훈련의 장점을 서로 보완한다면 한국 교회의 역동성을 회복하면서 미래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1년 총신대 교수로 임용된 이후 27년간 '한국기독교회사'에 매달려온 박 교수는 "한국 교회는 이제 다시 하나님 앞에 길을 묻고, 역사 앞에 길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박 교수 스스로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찾은 답은 '교회의 생명은 분립(分立)'이란 것이다. "우리가 1907년 평양대부흥은 잘 알고 있지만 대부흥의 중심이 됐던 장대현교회의 교회 분립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장대현교회는 평양대부흥을 전후해 평양 시내 동서남북을 비롯해 모두 39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1904년 9000명이었던 한국 개신교인이 1910년엔 18만명으로 20배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죠. 11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교회의 생명은 작은 교회를 여러 곳에 나눠서 세우는 '분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