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정신|러셀 커크 지음|이재학 옮김|지식노마드|856쪽|3만6000원

보수가 지금처럼 깊은 수렁에 빠진 때는 없었다. 정치인이든 지식인이든 이른바 보수엔 뚜렷한 비전도 성찰도 보이지 않는다.

1950년대 미국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급진주의와 진보적 자유주의가 정의인 것처럼 시대를 풍미했다. 보수주의는 경멸 대상이었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은 "미국에서 보수주의자란 말은 낙후한 사람이거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이라는 뜻"(1953년 8월 2일)이라고 썼다.

소설가이자 정치 비평가인 러셀 커크(1918~1994)는 이런 흐름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건강한 보수주의 전통의 회복을 주장한다. 커크는 "보수주의란 명예롭고 지성적으로 존경받을 만하며 미국 전통의 핵심을 이룬다"고 설파했다. 1953년 책이 출간된 후 이 서른다섯 살 젊은 지식인은 일약 전국적 스타로 떠올랐다. 30여 년 후 7차 개정판(1986년)을 낼 즈음 미국의 보수는 '사상 재무장'을 통해 정치의 주류로 자리 잡는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 책에 대해 "본질적 개념과 영원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여 미국의 보수가 부활하도록 했다"고 평가했다.

진보와 맞서는 이데올로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책이 아니다. 보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지 않는다. 보수는 인간 사회를 완벽하게 만들겠다고 선동하는 모든 시도에 맞서 싸운다. 보수는 열정만으로 '지상 낙원'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열정 때문에 '지상 지옥'이 만들어진다. 히틀러나 스탈린은 변혁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끌어냈다. 하지만 끝내 전체주의 독재라는 민얼굴을 드러냈다. 인간 사회란 한번에 때려 부수고 다시 만들 수 있는 기계가 아니다. 커크는 말한다. "보수주의자는 무장한 교리와 이념의 통제에 저항해야 한다. 보수주의자는 질서·정의·자유를 훼손하려는 자들에게 맞서 싸워야 한다"고. 그러므로 공익에 사익을 얹거나 부패와 손을 잡는 이들은 보수가 아니다.

지구를 받치고 있는 아틀라스. 보수는 오래 지켜온 질서를 부수고 새 세상을 만든다는 환상을 거부한다.

책은 보수주의의 기원을 1790년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을 낸 영국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1729~1797)에게서 찾는다. 버크는 바다 건너 대륙에서 일어난 핏빛 혁명을 비판했다. 혁명이란 거짓 관념과 헛된 기대를 불어넣어 실질적으로는 오히려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일이었다. 버크는 영국 사회를 튼튼하게 만드는 개혁은 지지했지만 정치 발전의 연속성을 깨고 완전히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으려는 시도에는 반대했다. 덕분에 영국은 질서와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숱한 사람을 죽이는 혁명의 불길을 피할 수 있었다.

보수는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태도이다. 그 태도란 신중함과 겸손일 뿐이다. 보수주의자는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대화와 타협을 통해 조금씩 개선을 이룬다. 버크는 "관습을 급진적으로 타파하고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실수하는 아이처럼 보일지라도 예전 관례를 유지하는 게 더 현명하다"고 말한다.

미국 보수주의의 창시자는 존 애덤스(1735~1826)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조지 워싱턴에 이어 제2대 대통령을 지낸 애덤스는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환상"이라고 여겼다. 그는 저서 '헌법을 옹호함'을 통해 버크와 마찬가지로 프랑스혁명의 전제를 반박했다. "인류를 완벽하게 만들겠다고 기대하는 사람은 인간성을 왜곡하고 파괴하게 된다"고. 훗날 프랑스 정치인이자 지식인 토크빌(1805~1859)은 보수주의 철학을 받아들인다. 토크빌은 '민주적 독재'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는 "미덕이 담긴 관습과 법률이 없다면 국민은 '위대한 짐승'이 된다"고 묘사했다.

850쪽이 넘는 이 대작은 버크·애덤스·토크빌 등 18~19세기 정치인·사상가부터 1950년대 시인 T.S. 엘리엇 같은 문학인까지 보수주의 전통을 역사 흐름에 따라 인물 중심으로 섭렵한다. 영국과 미국의 정치사, 두 차례 대전 같은 세계사와 어우러지며 보수주의 사상사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문명사가 되도록 했다. 'The Conservative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