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일 북한 외무성 북아메리카국 국장 직무대행이 지난 19일(현지 시각) 핀란드 헬싱키의 한 레스토랑에서‘남·북·미 1.5 트랙(반관반민) 대화’ 참가자들과 만찬 후 문을 나서고 있다.

북한이 5월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제재·압박을 유지 중인 미국의 의도를 의심하며 회담 성사 여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23일 확인됐다. 남·북·미 1.5트랙(반관반민) 회의 참석차 지난 20~21일 핀란드 헬싱키를 찾은 최강일 외무성 북아메리카국 국장 직무대행 등은 우리 대표단과 만찬을 할 때 미국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내며 "조·미 수뇌 상봉이 잘될지 모르겠다. 남조선 정부가 중간에서 애써 달라"고 말했다고 여러 회의 참석자가 전했다.

이는 북한이 한국 요구에 따라 미·북 정상회담을 제안하긴 했지만 실제 미국이 수락할 가능성은 작게 봤음을 시사한다. 외교 소식통은 "북한은 뒤늦게 미국의 진의를 확인하느라 바빴다"며 "특히 미국이 정상회담을 수락한 뒤에도 '최대 압박' 기조를 유지하자 당황한 기색이었다"고 전했다.

북한 관영 매체들은 정상회담에 관해선 침묵을 이어가면서 연일 미국의 제재·압박을 비난하고 있다. 노동신문은 23일에도 "제재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것은 대(對)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소식통은 "지금 북한은 미국에 '정상회담을 하겠다며 제재·압박을 계속 가하는 저의가 뭐냐'고 묻고 있다"고 했다.

최근 북한은 이라크 사례를 부쩍 자주 거론하고 있다. 노동신문 기준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수락(지난 9일) 이후에만 7차례, 이틀에 한 번꼴로 언급했다. 외교가에선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2003년 이라크전 직전 상황을 연상시킨다"는 분석이 많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WMD) 제거를 명분으로 이라크를 공격하기에 앞서 고강도 경제 제재를 가하고 이라크 인권 문제를 부각시켰다.

노동신문은 22일부터 리비아 사례도 언급하기 시작했다. 지난 3년간 북한과 14차례 비밀 대화를 가진 영국 출신의 너지 데바 유럽의회 한반도대표단장은 앞서 20일 "내가 비핵화를 주장할 때마다 북한 인사들은 (리비아의) 카다피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의 종말을 상기했다"며 "그들은 매번 내게 '카다피가 핵무기를 가졌어도 그와 같은 종말을 맞았을 거로 보느냐'고 물었다"고 했다.

북한의 불안감은 '대북 초강경파' 존 볼턴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지명되면서 더욱 증폭될 전망이다. 실제 이번 헬싱키 회의에서도 북한 관리들은 "미국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지는 게 걱정이다. 트럼프가 회담에 안 나오면 어떡하느냐"며 우려했다고 한다. 데바 단장은 23일 "북한은 핵무기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길 원한다"고 했다.

우리 정부가 난처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미·북 사이에서 펼친 아슬아슬한 중매 외교가 지금까진 그럭저럭 먹혔지만 만약 미·북 정상회담이 무산되면 한국은 양쪽 신뢰를 모두 잃을 수 있다"고 했다. 국책 연구소 관계자는 "지금은 남·북·미 3자 정상회담처럼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얘기를 할 때가 아니라 북한 비핵화를 어떻게 달성할지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했다.

한편 유엔 인권이사회(UNHRC)는 이날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총회에서 북한 인권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한 것을 평가하면서도 북한 내 억류자들에 대한 영사 접견 조치와 이산가족 상봉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리 외교부는 "결의안 채택을 환영한다"며 "북한 인권 상황의 실질적 개선을 위해 국제사회와 함께 지속적 노력을 강구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