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광장시장 '국선옻칠'은 42년째 같은 자리에 있다. 상호에는 나라 '국(國)' 자에 선할 '선(善)' 자를 써서 '나라에 이로운 나전칠기(螺鈿漆器) 공예품을 만든다'는 뜻을 담았다. 나전칠기는 옻칠 위에 잘게 썬 1㎝ 미만의 자개 편(片)을 붙여 정연한 문양을 그리는 전통 장식 기법이다.

국선옻칠은 1977년 광장시장 2층에서 2평 가게로 문을 열었다. 지금은 12평이다. 넓은 편은 아니지만 물류창고는 3곳을 쓰고, 경기도 남양주엔 생산 공장도 있다.

서울 중구 광장시장의‘국선옻칠’사장 오세운씨가 부채 모양의 나전칠기 공예품을 양손에 들고 있다. 국선옻칠은 1977년부터 42년째 같은 자리에 있다. 인터넷 쇼핑, 해외 납품 등 다방면으로 판매처를 넓힌 오씨의 뛰어난 사업 수완이 장수의 비결이다.

시장 한복판의 철계단을 올라가면 나전칠기 공예품이 늘어선 진열대가 눈에 들어온다. 자개로 장식된 보석함은 크기에 따라 5만~30만원 정도다. 기와집을 본뜬 '쌍합 비밀 보석함'은 선물용으로 잘 나간다. 천장에는 전구를 촘촘하게 달았다. 그 빛을 받아 나전칠기 공예품이 영롱하게 빛난다.

◇일본인 손님이 목이 멘 까닭은…

가게는 오세운(66) 사장이 아들, 딸과 함께 운영한다. 아들 오명호(39)씨는 10년 전, 딸은 8년 전부터 함께하고 있다. 나전칠기 기능인(문화재 수리 기능인)인 아들은 남양주 공장을 돌리고, 딸은 가게 경영을 맡는다. 가게 직원은 한 명이다. 손님 응대보단 공예품을 닦고 진열하는 게 주업무다.

가게 판매량은 전체 매출의 10% 정도다. 인터넷 주문이 매출의 절반쯤 되고, 단골 거래처 납품과 해외 수출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가게 진열대 아래를 들춰보면 배송을 기다리는 공예품 박스가 가득하다.

국선옻칠의 나전칠기는 외국인들이 특히 좋아한다. 국내의 한 대형 건설사는 1985년부터 10년간 매년 나전칠기 병풍 한 벌을 주문해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 선물로 보냈다. 한 벌 가격이 당시에 250만원이 넘는 특제품이었다. 인도의 부유층 대상 가구점, 러시아의 보석 업체에서도 5~6년 전부터 매년 나전칠기 보석함을 수백 개씩 주문하고 있다.

나전칠기 재료 전복 껍데기‘국선옻칠’에서 나전칠기 공예에 사용하는 전복 껍데기. 이 껍데기를 종잇장처럼 얇게 가공한 뒤 잘라 붙여 정연한 문양을 만든다.

가게를 막 열었던 1970년대는 일본인 손님이 주로 왔다. 몇 년 전엔 유커(遊客)가 반짝 몰렸다. 20여년 전 한 일본 손님이 5만원짜리 보석함을 가격을 잘못 알고 50만원이나 내고 사갔다.

안내를 하던 오씨가 '고센엔(5000엔·약 5만원)'과 '고만엔(5만엔·약 50만원)'을 헷갈려 벌어진 일이었다. 사정을 모르던 직원은 손님이 주는 대로 50만원을 받았다. 손님이 간 후에야 그 사실을 발견한 오씨는 장부에 '일본인 손님 50만원'이라 적고 그 손님이 다시 오길 기다렸다.

3년 뒤에 그 손님이 가게를 다시 찾았다. 오씨는 45만원을 거슬러줬다. "미안하다. 다시 와줘서 고맙다" 했더니 일본 손님이 목이 메 말을 못했다고 한다. 오씨는 "시장통의 가게가 비루하다며 낮게 보던 친구도 있었고, 시장 물건이 뭐 이리 비싸냐며 돌아서는 손님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 가게를 전시관이라 생각하고 버틴다"고 했다.

◇중국 왕사장도 꼼짝 못한 사업가 기질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 장수의 비결이 아니다. 오씨는 타고난 장사꾼이다. 가게 초창기엔 일본인 취향의 나전칠기 보석함을 주문 제작해 팔아 자리를 잡았다.

2008년엔 아들의 조언에 따라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었다. 지난 10년간 미국·중국·러시아·인도·말레이시아에 거래처를 뚫었다. 청탁금지법으로 선물용 고가 상품 판매가 줄자 명함함·손거울·서랍으로 판매 영역을 넓혔다.

납품하라며 찾아오는 해외 사업가도 있다. 중국 저장(浙江)성 이우(義烏)시의 유통업체 사장 왕(王)씨는 2012년 통역을 끼고 가게를 찾았다. 공장 투어를 하고 각종 서류를 꼼꼼히 훑고선 납품하라고 했다. 대신 거래 대금은 나중에 지급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오씨는 "선불 아니면 안 판다"고 으름장을 놨다. 왕사장은 망설이더니 다음 날 입금했다. 가게는 아직도 매년 5000만원대 공예품을 왕 사장 업체에 납품한다.

오씨는 "나는 장사꾼이지만 아들은 장인(匠人)이길 바랐는데 아들이 나전칠기 기능인이 됐다"면서 "아들이 만든 공예품을 가게에 진열해놨다.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