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 시각) 미국 반도체 회사 퀄컴을 싱가포르의 브로드컴이 인수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국가 안보'를 이유로 사(私)기업 간 인수합병(M&A)을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최대 1600억달러(약 171조원)에 달하는 반도체 업계 사상 최대 규모의 거래를 미 정부가 행정력을 동원해 막는 이면에는 미국과 중국 양강의 패권 경쟁이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번 거래를 막은 건 5세대 이동통신(5G)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5G는 기존 4세대 이동통신(4G)에 비해 20배 빠른 속도, 10배 많은 동시 접속이 가능해 인공지능·자율주행차 등 미래 산업의 핵심 기술로 꼽힌다. 퀄컴은 무선통신 칩의 세계 최강자로, 중국 화웨이와 함께 5G 선도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양강 업체로 꼽힌다.

문제는 시스템 반도체의 강자인 브로드컴이 원래 미국 회사였으나 2015년 화교자본이 장악한 싱가포르의 아바고에 인수된 후 중화권 기업화했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브로드컴이 중국 화웨이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어 퀄컴을 인수할 경우 국가 안보가 더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미국 정부가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 기업이 5G 기술을 장악해 미국 통신산업에 진출할 경우, 미국 통신 기밀이 노출되고 '군사·안보'상 위협도 높아질 것을 걱정한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행정명령에서 "브로드컴이 퀄컴을 차지하면 미국의 국가 안보를 손상시킬 수 있는 위협을 가할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증거가 있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5일 미 재무부 산하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는 이튿날로 예정됐던 퀄컴의 주주총회를 한 달 뒤로 연기하도록 명령했다. 브로드컴이 주총에서 표 대결을 통해 자파 세력으로 이사진을 바꿔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외국 기업의 M&A가 합의되기도 전에 CFIUS가 나서 막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브로드컴은 5G 핵심 기술을 보유한 퀄컴을 인수하기 위해 당초 1050억달러(약 112조원)였던 인수 제안 금액을 1170억달러(약 125조원)로 올렸다. 지난해 11월 초에는 혹 탄 브로드컴 최고경영자(CEO)가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싱가포르에 있는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브로드컴을 "대단한 회사"라고 칭찬했지만 결국 당장의 일자리보다 미·중 안보 대결에서의 주도권을 택했다. 미국은 '국가안보'를 이유로 최근 연이어 중국 기업의 미국 진출에 빗장을 걸고 있다. 올해 초 CFIUS는 중국의 온라인 유통업체 알리바바가 관계사인 앤트파이낸셜을 통해 미국 송금회사 머니그램을 인수하려 했던 것을 불허했다. 지난 1월 화웨이는 미국 2위 통신사 AT&T와 제휴해 미국 스마트폰 시장에 진출하려 했지만 미 의회가 무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