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언제까지 애들 행세하며 살아야 하냐. 귀찮아 죽겠다. 귀여운 척하기도."

열두 살 소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남동생이 내뱉은 말 때문이다. 펭귄 가득 그려진 내복에 젤리를 사달라 어리광 부리는 다섯 살짜리 내 동생이 어른이라고? 소녀는 온몸을 덜덜 떤다. 동화 '어른동생'의 한 장면이다.

황선미를 이을 차세대 동화작가로 주목받고 있는 송미경은“나처럼 느리고 끈기없고 소심한 사람도 열심히 반복하다 보면 길을 뚫을 수 있다”고 했다.

"저희 집 막내가 네 살 무렵 실제로 저한테 한 말이에요."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송미경(45)이 활짝 웃었다. '어른동생'은 그가 쓴 동화집 '어떤 아이가'에 들어 있는 다섯 이야기 중 하나. "'엄마! 마트에 가서 에스컬레이터 태워줄까?' 하길래 '네가 어떻게?'라고 물었어요. 그러자 '비밀인데, 실은 내가 어른이야' 하는 거예요. 영감이 팍 왔지요."

송미경은 요즈음 국내 아동문학 시장에서 반가운 충격을 일으키고 있다. 3만 부 넘게 팔린 대표작 '어떤 아이가'는 한국출판문화대상을 받은 데 이어 최근 영국 북트러스트 '올해의 외국도서'의 최종 후보작에 오르면서 또 한 번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작가 황선미는 '어른동생'을 두고 "오싹하고 슬프고 재미있고 기이하다. 한국 아동문학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새로운 작가의 탄생"이라고 했다. '어른동생'은 가족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현재 대학로에서 절찬 상연 중이다.

'어른동생'에 실린 삽화.

송미경 작품 속 인물들은 시장에 가서 하고 싶은 말을 맘껏 할 수 있는 혀를 사오거나, 부모를 고양이로 갈아치울 만큼 발칙하다. '돌 씹어 먹는 아이'처럼 재미와 깊이를 동시에 거머쥔 작품들을 썼다. 광인(狂人) 말기 진단을 받은 한 소녀가 집도의와 손잡고 자신의 수술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청소년 소설 '광인 수술 보고서'도 있다. 올봄엔 신작 '봄날의 곰'과 '소파 때문에 생긴 일'을 펴낸다.

한 살 터울 남동생과 경기도 외가에서 자랐다. "해질 무렵 동네 어귀 바위에 앉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지켜보는 걸 좋아했어요. 이모와 삼촌들이 보던 책들을 머리맡에 쌓아두고 밤새 혼자 읽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죠."

20대 중반까지 그의 삶엔 세찬 비가 내렸다. 별명이 '외유내유(外柔內柔)'일 만큼 골골댔고 끈기 없고 덜렁댔다. 개척교회 목사와 결혼해 3남매(17·14·10세)를 낳아 키웠지만 "동화를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서른다섯에 돌도 안 지난 셋째를 업고 홀린 듯 동화를 썼다. 남편은 '당신이 열중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며 문학상 출품을 권했다. 2008년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로 웅진주니어문학상을 받았다. 덜컥 겁이 나 숭실대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갔다. 졸업 후 '어떤 아이가'와 '복수의 여신'을 집필했다. "어린 시절 외로웠던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고 했다.

송미경의 동화는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향한다. 그리움에 대한 슬픈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 "세상의 불편한 부분들을 보여주되 나와 남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주는 거지요. 기존 질서에 대해 '좀 이상하지 않아?'라고 말을 걸지만, 애정을 갖고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너의 곁에 꼭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싶어서요."

그는 "동화를 많이 읽으면 자신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을 이해할 때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맨날 보던 친구가 어느 날 인사를 안 하면 아이들은 대개 '내가 싫어졌나?' 생각해요. 반면 '부모님이 싸우셨나?' '키우는 고양이가 아픈가?' 헤아려주는 아이도 있지요. 엎어지고 실수하고 결핍을 메우면서 다양한 경우를 상상하는 것. 동화의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