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정부는 지난 13일,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인촌 김성수 선생의 건국공로훈장 서훈을 취소하기로 의결했다고 한다. 그들이 인촌을 아는가?

백완기 교수가 쓴 책 '인촌 김성수의 삶'을 보면, 인촌(1891~1952)은 자기가 기획을 돕고 후원했던 3·1운동이 실패하자 국권 회복을 위해 민족 역량을 길러야 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양부와 친부를 설득해서 가산을 국가의 경제력 증진과 국민 계몽, 인재 양성에 쏟아부었다. 조선 최초의 기업인 경성방직을 설립할 때 청년 김성수는 전국을 돌며 주주(株主)를 모집해 국민에게 산업화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깨우치려 노력했다. 동아일보를 창간해서 국민의 눈을 띄워주고 민족정기를 고취했고 중앙학원을 설립하고 보성전문(고려대학교의 전신)을 인수해서 민족 사학을 열었다. 뛰어난 인재들을 만나면 해외 유학을 보내 지도자로 양성했다.

그 엄혹한 시기에 어떻게 일제의 '협조'를 얻지 않고 민족 기업, 언론, 교육 기관을 운영할 수 있었겠는가? 일장기 말소 등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누차 정간, 폐간 위기에 놓였다. 반일 데모로 다른 학교에서 퇴학당한 학생을 모두 입학시켰던 중앙고보, 일제가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로 지목했던 보성전문은 자주 폐교 위기를 맞았다.

그럴 때, 인촌이 호기롭게 총독부를 꾸짖어서 경방, 동아일보, 보성전문이 폐업, 폐간, 폐교했으면 우리 민족에 도움이 되었겠는가? 인촌이 굴욕을 참고 이 기관들을 살렸기에 일제하 조선이 덜 춥고 덜 어둡고 덜 빈약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인촌 선생은 독립운동가라면 사상·노선·방법을 막론하고 지원했고, 창씨개명도 끝내 거부했고, 일제가 주겠다는 남작 작위도 거절했다. 그러나 보성전문 농장의 닭들이 굶주려 비실거리는 꼴을 보고는 총독부 축산과 서기를 찾아가 '사정'해서 사료를 얻어다 먹였다고 백 교수는 전한다.

굶주린 닭을 먹이듯 민족 기업, 언론, 학교를 살리고자 일제에 고개 숙인 것이 민족 반역인가? 총독부에 불려갔을 때, 탄원하러 갔을 때 인촌 선생의 굴욕과 비애를 생각하면 죄스러워진다. 중앙고보, 보성전문 교장으로 학교 건물을 지을 때 인부들과 함께 막일을 하고 청소도 해서 학생들이 수위 영감으로 알았다는 인촌 선생은 절대 훼손해서는 안 되는 민족의 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