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풍기 강원대 교수

시골 출신인 나에게 설날에 대한 추억은 다채롭다. 아침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께 세배하는 것이야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예전에는 동네 또래들이 설빔을 차려입고 삼삼오오 짝을 찌어 마을을 돌면서 마을 어른들께 세배하러 갈 채비를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풍습에 세뱃돈을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세배를 마치면 집집마다 떡이나 엿, 강정, 과일과 같은 설음식을 내주시곤 했다.

마을에 할머니 혼자 사는 집이 있었다. 평소에는 인적 하나 없이 고요한 집이어서 친구들과 재잘거리면서 무리지어 다니다가도 그 집 앞에만 이르면 괜히 눈치를 보면서 얼른 지나가곤 했다. 그러니 설날이 되었다 해도 자발적으로 세배하러 가기는 쉽지 않았다. 어린 초등학생이 마음을 내기에는 그 집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웠던 탓이었으리라.

저물녘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혼자 사는 할머니 댁에 세배를 다녀왔는지 어른들이 물어보곤 하셨다. 그러고는 그릇에 약간의 음식을 담아서 가져다 드리라고 하고, 간 김에 세배도 하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나는 그렇게 늘 저물녘 늦세배를 하곤 했다. 아마 멀리서 찾아오는 자손도 없이 쓸쓸한 설을 보내는 동네 어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설날이 되어도 집에서 혹은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보다 개인과 가족의 일정에 따라 놀러다니는 사람이 늘어난다. 설날이 가지는 문화적 의미보다 연휴 개념이 점점 강해진다는 얘기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공동체가 현저히 약화되었다는 뜻이리라. 혈연 중심의 부족사회에서 취미나 직업에 따른 부족사회로 변화하고 있다는 걸 주장하는 사회학자들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도기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삶과 사회가 변화할 수밖에 없다면, 그 핵심에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배려가 자리하고 있다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