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서울 금호아트홀에서 공연 직전 리허설을 하고 있는 알렉산더 크냐제브.

회색빛 머리칼이 이마 위로 쏟아졌다. 지난 8일 오후 8시 서울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마스터즈 시리즈' 무대. 온 국민 관심이 강릉아트센터에서 열린 북한 예술단 공연에 쏠려 있을 때, 머리 모양부터 범상치 않은 이 남자는 광화문 한복판에서 말없이 첼로를 끌어안았다. 첼리스트 알렉산더 크냐제브(Kniazev·57). 서른여덟이던 1999년 러시아 최고 음악가에 선정된 그는 러시아 첼로의 전설 로스트로포비치를 잇는 후계자로 찬사받고 있다.

그는 이날 네 시간에 걸쳐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全曲·여섯 곡)을 선보였다. 작곡된 지 300년 지난 오늘날에도 수많은 음악가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거작(巨作). 첼로 하나로 복잡한 화음과 둘 이상의 선율을 동시에 그려내야 하기에 연주자에겐 가장 어려운 곡, 듣는 이에겐 강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곡이기도 하다.

모음곡 1번부터 연주가 시작됐다. 마디마다 굳은살 박인 왼손가락은 지판 위를 사뿐사뿐 누비며 음을 또렷이 짚어냈다. 현에 달라붙은 활은 놀랍도록 진한 여운을 남겼다. 악기는 1733년산 베르곤치. 정명화의 첼로 스승 퍄티고르스키(1903~1976)가 사용해 유명해졌다. 러시아 정부 소유로 푸틴 대통령이 그가 쓸 수 있게 대여해줬다고 했다.

바깥은 영하의 날씨지만 모음곡 4번에 이르자 크냐제브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땀으로 촉촉해진 머리카락이 뺨에 들러붙었다. 연주가 시작된 지 두 시간여. 청중의 집중력도 한계에 달한 시점이다. 그러나 크냐제브의 연주는 밀고 나가는 힘이 있었다. '알르망드'와 '사라반드'는 가볍고 깨끗하고 노래하듯 우아했다. '지그'에선 당당한 품격이 배어 나왔다. 경쾌한 리듬이 도드라지는 '부레'와 '가보트'에서 간혹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으나 청중은 개의치 않았다. 깊이 있는 소리에 빨려 들어갔다.

'마라톤 연주'를 위해 전날 오후 서울에 도착한 크냐제브는 열다섯 시간 내리 푹 자며 에너지를 충전했다고 했다. 연주 전 샌드위치와 타르트, 커피 등으로 가볍게 배를 채운 그는 두 번의 중간휴식 때마다 뜨거운 커피와 홍차를 마시며 기력을 보충했다.

앙코르로 그가 건넨 마지막 인사는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의 '샤콘'. 끝까지 남아 있던 관객 240여 명은 잊지 못할 연주를 들려준 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