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명문대 출신의 1941년생 Y씨는 현대건설 중기 공장에 관리부장으로 발령받았다. 정주영 회장의 전폭적인 신뢰 속에 이뤄진 빠른 승진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Y씨는 예상치 못한 난제에 봉착했다. 서울 한강변 동부이촌동에 위치한 공장의 입지가 문제였다. 인근의 한강맨션 주민들로부터 민원이 끊이질 않았는데, 분진과 소음이 심하니 공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해달라는 것이었다. 해결의 실마리는 의외의 장소에서 풀렸다. 공장 인근에 지어진 민간 건설사의 모델하우스에 방문한 덕분이었다.

사실 Y씨에게 동부이촌동은 낯선 동네였다. 아파트 단지에서 꼬마들이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노는 광경이나, 출근길마다 마주치는 자가용 승용차 행렬은 외부인에게는 위화감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Y씨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 그 이상이었다. 확실히 한강맨션은 서울 중상류층 일부의 거주지를 사대문 안에서 한강변으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중대형 아파트의 주거 형태를 골격으로 삼아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선보이고 있었다. 경제성장이 가져올 '서울의 미래 주거 패턴'이 바로 이 동네에서 결정되고 있는 것이었다.

Y씨는 시장 경쟁에서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곧바로 새로운 사업안을 정주영 회장에게 건의했다. 공장을 이전하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짓자는 것. 그러니까 민원 해결과 아파트 사업 진출, 두 마리 토끼를 잡자는 것이었다. 정 회장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에이, 아파트는 무슨 놈의 아파트. 우리가 아파트 사업을 하면 사람들이 웃지 않겠나?"

경부고속도로나 소양강댐 같은 대규모 국책 토목 사업을 이끌던 기업의 최고 의사 결정권자에게 아파트 건설은 매력적인 사업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중소 건설사나 뛰어들 법한 '집 장사'였다.

흥미롭게도 정 회장이 생각을 바꾼 것은 육사 8기 출신의 장동운 대한주택공사 총재를 찾아가 조언을 구한 직후였던 듯하다. 당시 장 총재는 60년대식 서민용 아파트와의 단절을 꾀하기 위해 내놓은 한강맨션의 성공으로 크게 고무된 상태였다. '월간조선' 2006년 7월호에 실린 장동운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정 회장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아파트 사업, 그거 돈이 됩니까?" 답변 역시 간단명료했다. "무조건 되니까 해보시죠." 다음은 장동운씨의 회고다. "그러더니 정 회장이 한강맨션 인근에 있던 회사 터에 아파트를 짓더군요. 정 회장은 큰 재미를 봤습니다." 한강맨션의 바통을 이어받아 '본격 아파트 시대'를 주도할 현대아파트 신화의 서막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다시 Y씨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그는 사업안을 제안하고 얼마 후 이사로 승진했고 이후에도 중동 건설 붐과 함께 승승장구해 1977년에는 35세 나이로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나 대선에 보수 야당 후보로 나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2000년대 초·중반, 부동산 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뉴타운 열풍과 강남 재건축 열기가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잦아들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